가장 소중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처럼 나 자신을 포옹하라
살면서, 마냥 착하게만 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엔 온갖 악이 가득하고 불공정, 부정의, 거짓, 증오 등이 넘쳐난다. 보지 않으려는 자, 눈 감는 자, 귀를 막은 자, 즉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대로 심미주의적으로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보려고 하는 자, 들으려 하는 자, 비판적으로 사는 자, 주체성을 갖고 세상에 맞선 자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빤히 보인다.
나는 23년을 그저 착한 자로 살았고, 나머지 24년을 주체성을 가진 자, 철학하는 자, 글을 쓰는 자로 살아왔다.
땅바닥에 몸을 붙이고 움직임이 없는 돌은 저항을 받을 일조차 없으나 일어서서 걸으려는 자, 목표가 있는 자, 삶의 방향을 확고하게 잡은 인간에게는 저항이 큰 법이다. 바람이 강하게 몸을 짓누르고 폭우가 내리고 우박이 내리친다. 자신을 곧추세운다는 것은 세상의 저항에 홀로 선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핍박과 증오, 음모와 비난 앞에 우뚝 버티고 서야 한다는 의미다.
착한 자로 살았을 때와 그렇지 않은 때, 이 두 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타인의 미움을 받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착하게 살았을 때, 즉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은 채 늘 중립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양심, 진실을 옹호하고자 하는 태도 때문에 받게 되는 증오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착한 자의 삶, 주관 없이 이쪽 저쪽 다 기웃거리던 삶을 포기하고 확고한 관점과 양심을 무기로 진짜 내 항해를 시작하게 되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해진다.
사람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이를 경계하기 마련이다. 낙인을 찍고 딱지를 붙여 분류하고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이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이란 이미 다이아몬드와 같이 단단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찾지 못한 자다. 이것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색깔과 맛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썩은 낙엽 같은 것이고 널린 돌 같은 것이다. 성장도 없고 움직임도 없이 죽어 있는 것이다. 자연을 증오하는 자는 없으나 인물을 증오하는 이가 많은 것은 인물은 살아 있고 움직이며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짐을 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진 짐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언론사에 입사하면서부터 미움 받을 용기를 내 몸에 장착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쓰고 소리칠 용기를 장착했고, 진실은 진실이라고 말할 용기를 장착했다.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됐다. 증오의 대상, 표적이 되었다. 이는 내가 지고 나가야 할 십자가다. 나는 그것을 포기하거나 부정하거나 피해 갈 생각이 없다.
나는 내 안의 모든 악마성을 동원해 거짓과 부정의에 반항할 것이다. 이는 내가 눈 감는 그날까지 중단할 수 없는 행위이자 신념이다.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를 향해서 무관심을 보일 것이며 위협하고 공격하는 이에 대해서는, 무례한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나의 악마성을 표출할 것이다. 단호하게 반박하고 선을 긋고 꾸짖을 것이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