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는 잘못이 뭔지 설명해 줄 만한 어른이 필요하다
사달이 안 나길 바랐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학기초부터 딸애로부터 그 녀석(문제의 그 남학생 짝꿍)에 대해 줄곧 하소연을 들어오던 터여서.
딸애가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을 멋대로 망가뜨려 놓고 사과를 안 한다.
이 사건이 내 기억으론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녀석이 딸애 물건을 건드려 망가뜨렸고 사과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부터 둘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나는 안다. 딸애는 그 일로 며칠, 아니 몇 달을 속앓이 했다. 마음이 몹시 분한 모양이었다. 아끼던 물건이었던 데다, 이 남학생 짝꿍 녀석이 너무 무심하게 망가뜨려 놓고는 사과도 안 한다니, 그럴 만했다.
자기는 사과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대.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거야.
나는 이 짝꿍이란 녀석이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우선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인지 공감하는 능력이 제로다. 행동이 무례하고 반성할 줄 모르며 개선의 여지가 없다.
딸애는 그 사건 말고도 자주 그 녀석의 행태, 선 넘는 행동, 무례함, 난데없이 끼어드는 안하무인 행동 등에 대해 내게 말해 왔다. 둘 간에 기묘한 신경전이 계속 오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원하지 않는 대형 사건이 터지리라 직감했다. 다만,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제, 오후에 일을 하고 있는데, 큰 딸애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아주 심심하다거나 급한 용무가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아이다. 나는 잠깐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딸애는 약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애가 내 머리를 플라스틱 빗자루 채로 내리쳤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빠?
뭐? 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딸애는 상황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여자친구들끼리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학생 녀석이 갑자기 와서는 과자를 한 움큼 쥐고 먹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자애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그 상황에 난감해 했다. 그 순간 내 딸애가 정의감으로 그 녀석에게 말을 했다.
너, 허락도 없이 과자를 먹으면 어떻게 하니? 잘못된 행동 아니야?
그러자 녀석이 쥐고 있던 빗자루로 내 큰 딸애 머리를 냅다 후려친 모양이다. 거기까지다. 나는 일단 딸애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3시 반. 1학년 교무실도, 학교 교무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6시 반쯤 퇴근하면서 딸을 통해 담임더러 통화하자는 메시지를 건넸다. 그리고 7시쯤 딸애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담임은 30대 여자의 목소리였고, 옆에서 아기가 울어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담임이 간난애기 엄마라는 이야기를 딸애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아버님, 안 그래도 통화를 하려고 했는데요... .
담임이 장황한 스토리를 설명했다. 나는 우선 담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남학생의 평소 태도, 성격, 교우 관계 등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였다. 내가 궁금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아이 부모는 가능한 한 학교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처벌을 해 달라고 하네요, 아버님.
내게는 그 이야기만 중요했다. 싹수가 노란 부모는 아닌 듯했다.
학교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징계란 게 뭘까요?
글세요. 그건 가 봐야 아는데요. 예를 들면 아버님이 원하시면 학폭위를 진행할 수도 있고요. 학폭은 요새 저희 교사들이 진행하는 게 아니라 교육청에서 맡아 진행하거든요.
긴 대화가 오갔는데 줄이자면, 나는 담임에게 '해당 학생 부모가 저에게 직접 전화 주라, 고 전해 주십시오. 전화가 안 걸려 오면 바로 학폭 진행하겠다는 것도.'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 녀석의 태도를 바로잡는 것이다.
식구들과 저녁을 먹는 중에 아이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니는 내게 다짜고짜 사과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공손한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오늘 같은 경우는 문제가 좀 심각해 보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친구가 학기초부터 활리한테 물리적인 폭력을 쓰고,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망가뜨려왔다고 하더군요.
네, 죄송합니다.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불쑥 그렇게 물었다. 도를 넘는 질문이긴 한데, 어른 대 어른으로 그 점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게 제가 키우는 아이인데, 문제가 있는지는...
그렇군요. 우선 아이와 제가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면서 용서를 구했고, 아이와 통화를 허락했다.
안녕하세요!
아이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간다.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어른과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해 겁이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녕하지 못하구나, 오늘 저녁은.
아, 죄송합니다.
녀석이 대뜸 사과부터 한다.
활리 머리를 빗자루 채로 내리쳤니?
네. 활리랑 좀 오랫동안 안 좋은 사이였어서요.
변명이다. "이 아이가 좀 약은 아이라서 저한테도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더라고요." 담임 선생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이 녀석에게 말했다.
학기 초부터 활리랑 계속 좋지 않았지?
네.
네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있니?
선물 받은 랜턴이 있는데 그게 가장 소중해요.
아저씨가 볼 땐 그 랜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저씨가 그걸 좀 부숴 버리면 넌 기분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망가뜨린 활리 물건도 활리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었는데, 넌 사과조차 하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너 책 많이 읽는다며?
네.
책을 읽는다는 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읽는 것 아니야? 그런데 지금까지 네 행동을 보면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구나. 약한 여자애들만 때리거나 괴롭히고 물건을 함부로 만지고 망가뜨리고. 그게 네가 책을 읽는 이유야?
아니요. 죄송합니다.
아저씨는 네가 앞으로 그런 행동을 절대 하지 않기를 바라. 그건 너만 할 수 있어. 나쁜 행동을 멈추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거, 어렵지만 할 수 있을까?
네.
아저씨가 볼 때 그건 너한테 아주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네가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면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 질 거야. 만약 그렇지 않고 네가 지금처럼 나쁜 행동을 일삼는 나쁜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테고. 어떻게 할래?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그 녀석에게 굳은 다짐을 받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 아침에 활리를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라, 는 약속도 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그 아이의 폭력성, 그릇된 대인관계 행태, 사과하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르는 태도는 그 아이의 문제가 첫 번째,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교정해 주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이 두 번째다. 그러나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고 중대하다. 아이는 어떤 면으로 영악해서 어른들의 반응을 살피고 그 행동을 지속할지 말지 결정한다.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교정해 줄 책임이 어른에게 있는 것이다.
활리야, 그런 아이들을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거야.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그 자리에서 애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나라도 나서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건 잘했어. 하지만 모든 문제를 네가 바로잡을 수는 없어. 어떤 건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야 해. 네 자신을 위해서 말이야.
그건 정의롭지 못하잖아.
정의롭지 못하지. 하지만 너 자신을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담임선생님한테 문자라도 한 통 넣어 드려. 오늘 잠도 잘 못 주무실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는 담임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10시쯤 방에 들어가 보니, 활리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보통은 자정이 다 돼야 자는 아이인데 오늘은 심신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나는 딸애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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