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안이하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항상 군중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고 군중 속에 섞인 채로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프리드리히 니체
새로운 경향이라고 흔히 말하는 것을 듣는다. 요즘 사람들, 복잡하고 어려운 것 싫어해. 에잇, 너무 진지하고 깊이 들어갔네, 그러면 사람들이 안 읽지.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사내게시판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깊이 있는 건 싫어해. 그냥 가볍고 단순하고 재미 위주로 써야 읽지 않겠어? 무슨 대단한 철학, 깨달음이라도 있는 양 참견조로 말한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 대학생들, 젊은이들, 깊이 있는 걸 싫어한단다. 거의 혐오,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 거부감이다. 명문대를 졸업해도 그 흔한 철학 서적 한 권 읽은 이를 찾기 어렵다. 웹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데, 시중 서가에 가면 온갖 가벼운 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는데, 나에게는 도무지 생경한 풍경이다.
물론 나, 그런 풍조 그런 생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내 생각이다. 내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치고 싶은 것, 그건 깊이이지, 얕은 지식이 아니다. 성적? 그래서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어와 수학, 과학은 정보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 체험은 그 정보에 대한 정보를 얻는 행위다. 즉 메타 정보다. 우리는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감탄하지만 이 건축물의 배경지식을 안다면 궁전이 가진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메타 정보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깊이 알 수 없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깊이 들어가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리전문가 백종원 씨,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 씨, 의사 오은영 씨 등의 공통점은 깊이다. 깊이 들어간 자만이 인사이트를 가질 수 있다.
깊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고전이다. 인문학 서적이다. 철학, 문학, 역사 같은 분야는 대개 깊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게 된다. 그럼 요즘 사람들은 문학이나 역사 따위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건가? 응, 맞아, 그거야. 아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반문한다. 몰랐어? 에휴 살기가 얼마나 팍팍한데 언제 시간을 내서 그런 걸 봐? 오빠 같은 사람이나 읽겠지.
그렇구나.
아내는 그리고 친구들은, 나를 꽤나 잘 아는 지인들은 날 위한답시고 조언한다.
이봐, 쉬운 걸 써 봐. 재미나면 더 좋겠지. 사람들, 그런 걸 좋아한다니까. 드라마 같은 건 써 볼 생각없어? 드라마 쓰는 작가들 돈 잘 번다든데.
그... 그렇지.
그러다 우연히 브런치란 델 알게 됐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마치 경연을 펼치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광장. 고민 끝에 브런치를 선택해 글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웬걸. 구독자도 생기고 좋아요, 도 마구 눌러준다. 이거, 꽤 흥미로운 걸?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다. 브런치에서도 같은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쉬운 걸 써 봐. 간단한 거,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브런치에 열거된 수많은 글을 본다. 참 다양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데 내 이야기는 언제쯤 더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될까.
그걸 아는가? 글이란 독자 없이는 생명력이 없는 생물이다. 어떤 작가도 독자 없이 작가일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마치 해를 향해 가지를 뻗어올리며 사투를 벌이는 나무처럼 독자를 향해, 독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무한 사투, 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건 작가의 생존 방식이자 존재의 양식이다.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균형이 중요하겠지. 무조건 흐름과 경향만을 쫓아가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늘 말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 작가는 스스로 판단자여야 하고 심판자여야 한다. 섬세한 촉각을 가지고 자기 글을 평가해야 하고 온전하고 제대로 된 양식을 독자들에게 내놓아야 한다. 그것 아는가? 어그로 끌려고 하는 이들, 많이 팔려 MSG를 덩어리째 넣는 이들, 안 좋은 식재료란 걸 알면서도 입맛을 자극시킬 수만 있다면, 유해한 식재료라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이들, 그런 이들 줄을 세우면 끝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1861년 6월 30일 아침 8시 30분, 창문 너머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레 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제는 죽어도 좋아." - 빅토르 위고
자그마치 16년 동안 소설을 집필한 것이 빅토르 위고다. 요즘? 그런 작가는 극히 드물다.(위고처럼 못 해서라기보다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옛날 책일수록 두꺼운 이유를 아는가? 책이란 게 유일한 미디어였기 때문이다. 영화, TV가 등장하면서 책은 한층 얇아졌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다시 한번 책 두께가 얇아지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고전, 답답한 면이 없지 않다. 쓸 데 없이 길고 장황한 것 맞다. 그 시절엔 그게 유일한 매체였으므로 장황하게 길게 깊게 써도 읽혔다. 지금은? 책 말고도 미디어가 널린 시대이므로 책 역시 책답게 간결하고 더 명쾌해져야 한다는 것,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이야기해야겠다. 깊이라는 것, 완성도란 것, 심층이란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얇은 것, 간단한 것만으로는 당연히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면 제대로 알 수 없다.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수박 겉핥기일 뿐이 아닌가?
미안하지만, 문학은 깊이 들어가는 행위다. 세계와 자연의 본성, 인간 본성, 이 세상의 무심한 아름다움과 무관심, 인간의 나약함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 역시 결코 얕은 데 잠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 생을 제대로 살아내고자 하는 자, 반드시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들어갔을 때 인간은 성취란 걸 얻게 된다. 나의 격, 즉 인격이 올라가고, 교양이란 게 쌓이는 것이다.
그러니, 얇은 것 간단한 것에 대한 예찬은 자유이되 진실마저 외면하지는 말자. 깊이 들어가지 않는 자, 깊이 볼 수 없고 깊이 생각하는 것 불가능하다. 얇은 것에 열광하면서 다 아는 척하지 말자. 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얻으려면 구해야 하고, 깊이 알려는 자는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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