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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도 아니고 X세대도 아니고 68세대도 아닌 그냥 나

by 김정은

그런 말, 우습다. 무슨 세대니 무슨 그룹이니 하는 말.


흔히 X세대라 불리웠던 이들, (내가 속한 그룹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반항적이며 개성이 넘치는 이들처럼 정의되었다.




X세대라는 세대명 자체는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Douglas Coupland, 1961 ~ )의 1991년작 소설 <X세대>에서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미권에서의 X세대론은 1965년 이후 출생자를 말하며, 2000년대 이후 밀레니얼 세대와 구분을 위해 1979년생까지로 정리되었다. - 나무위키)


다소 동떨어진 '언론용 용어' 취급받는 MZ세대와는 다르게 'X세대'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빠르게 수입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선 1990년대 20대들을 수식할 때 'X세대'라고 일컫게 되면서 1965-1968년생 중에도 언론에서 X세대라고 부른 유명인들이 많았다. (...)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의 '신세대 · 마니아 · PC통신' 챕터에서 X세대를 다뤘는데,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 1990년대 신세대의 가치 선언적 음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 <신인류의 사랑>을 만든 장호일(1965년생), 정석원(1968년생) 형제도 1965~1968년생 그룹이다. 이들도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와 패션을 추구하며 X세대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이는 X세대가 기성 세대와 다름을 내세우고 항상 자신을 튀어보일 수 있게 '개성'을 추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위키)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것은 새로운 문화를 낳고 새로운 패션, 흐름, 경향을 낳기 마련이다. 내가 자라던 시기, PC가 보급되었고 핸드폰이란 통신 기기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자동차 생산도 한층 증가하는가 하면 부동산은 더 빠르게 부의 수단으로 고착됐다.


삶의 양식이나 행동 패턴, 가치관 등이 조금 바뀌긴 했겠으나 인간이란 기본적인 생존 양식, 욕망, 의지 같은 것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60대나 지금의 나(40대)나 욕망이나 의지라는 차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우리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들, 즉 경험과 체험, 가치관 같은 것은 대개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리고 이에 따른 문화적 체험의 차이에서 온다. 그러니 다른 것들이 분명 있으나, 사실은 같은 것이란 바탕 위에서 약간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수준의 차이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MZ세대



MZ세대의 고유성도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의 보급,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확실히 다른 체험을 지닌 것뿐이다.


19세기 인간과 21세기 인간이 다른 것은 그들이 공유한 문화, 그들이 입은 과학과 기술의 혜택, 물질 문명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근본적인 욕구나 의지는 거의 다르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지금 내 삶이나 근본적인 조건은 동일하다. 자신의 삶이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모든 인간은 이 대명제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리 와라, 하고 소리치는 것과 스마트폰으로 잠시 와 줄래, 하고 문자를 보내는 것이 큰 차이로 보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온다는 행위, 부른다는 행위, 그래서 만난다는 것,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란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삶이란 문제, 고통과 고난이란 삶의 조건, 책임과 양심이라는 것 등에서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크다.


왜 차이를 논하는가?


아마도 인간은 같음보다는 차이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끼고 그것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동시에 자신을 어느 그룹 속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누리는 편의성도 쉽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차이보다는 같음을 더 크게 봄으로써, 나는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나는 어떤 면에서 15세기 인간을 흠모하고, 18세기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며 또 20세기 인류에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관심이 크고 호기심을 갖는다. 내가 느끼는 것은 그들이 과연 21세기를 사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하는 것, 즉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나는 종교적 민족적 내전이 많은 아프리카의 어느 소수 민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또 전쟁으로 큰 비극을 겪었던 1930년대 유럽에서 살지 않은 것에도 감사하는 편이다. 대한민국에서 1976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만족하지는 않지만 감사할 측면이 많다. 냉전, 이념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출생함으로써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과학 문명의 이기도 꽤 누린 편에 속한다.


인간을 몇십년 단위로 근시안적으로 나누지 않고 좀 더 광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많다. 우리는 세네카나 단테, 미켈란젤로나 피카소로부터 꽤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나와의 차이보다는 공통점과 유사성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조건 속 인간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점에서 꽤 괜찮은 해법을 찾도록 도와준다.


흔히 고전을 읽어라,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라, 고 말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좀 더 넓게 자신을 바라보라, 하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상하게 들릴 수는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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