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경우, 조언이란 하는 경우에도 듣는 경우에도 쓸 데 없는 것이다. 물론 꼭 필요한 조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희소하다. 유용한 조언을, 그것도 제때 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흔치 않다. 그러나 그런 이의 조언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섣불리 조언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무용하다. 서점의 서가에 도스토예프스키나 니체의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된 조언을 들으려 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청년이라면, 학벌 욕망에 잔뜩 어두워진 눈을 깨끗한 물로 씻고 인류가 남긴 참된 지혜의 조언에 눈을 떠야 한다.
나름 식견을 갖췄다고 확신하는 이들로부터 숱한 조언을 듣는다. 회사를 가도, 조기축구를 가도, 교회에 가도 조언하려는 자들이 줄을 서 있다. 그들의 조언이란 대개 쓸 데 없는 잡담 수준의 말들이다. 이걸 어디에다 써먹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그런 것들이다.
너나 잘하세요!
우리의 유전자와 성향, 철학과 사상이 저마다 다르기에 가장 유용한 조언은 이것이리라. 오직 너만의 독창적인 길을 홀로 가라!
나의 경우에, 딱히 타인을 향해 조언을 할 겨를이 없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살기에도 바쁘다. 내가 얼마나 오류와 문제투성이 인간인지 깨닫고 부서지고 깨지는 데에도 힘이 부친다. 그것은 행복한 실패이자 패배이며,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열정의 산물이다. 나의 경험상 한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 체험의 기쁨 말이다. 이러한 삶에서 가장 현실적인 조언자는 내면의 비평가, 내면의 채찍, 내면의 목소리다. 나는 매일 매순간, 그의 조언을 새겨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이다. 사색이, 독서가, 글쓰기와 산책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걷는다. 그 걷는 모양이, 걸음걸이가, 팔을 휘저으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좀 미안하지만 우스꽝스럽다. 물론 나 역시 산책 후엔 몇 보나 걸었는지 확인을 하는 편이다. 5천보, 만 보를 넘기면 왠지 성취감도 든다. 그러나 산책은 어디까지나 지적 성장을 경험할 때 참된 의미가 생기고 몸에도 이로운 법이다. 지적 성장이 없는 걷기란 사실상 늑대의 걷기, 고양이의 걷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주의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지구상에 건강해지기 위해 걷는 고양이나 늑대는 없다. 사파리를 평정한 수컷 알파 사자는 건강을 위해 산책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지 위를 거니는 사자는 우아한 데다 깊은 아우라를 풍긴다. 인간의 산책에서 우아함과 아우라가 없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오직 인간만이 건강을 목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걷는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은 늑대나 고양이, 사자보다도 산책의 즐거움을 모르는 종인지 모르겠다.
한 마디 좋은 조언을 건네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에서건 적어도 10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한 체험과 과정을 거친다면, 비로소 한 마디 조언을 할 자격을 얻을 것이다. 그 조언은 생생하고 가치가 있으며 힘이 있다.
가장 무지한 자가 살아 온 나이를 가지고 조언하려 드는 이일 것이다. 그들의 조언이란 그저 '사탕을 씹어먹을 땐 이렇게 해'라고 조언하는 열 살 배기 어린아이의 조언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사탕을 이렇게 씹든, 저렇게 씹든 도대체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열 살 배기의 조언은 열 살 배기들 사이에서나 유용한 법이다.
타인에게 무심코 조언 따위를 건네지 말라. 타인이 무심코 던지는 조언을 귀담아 듣지도 말아라. 대개가 쓸 데 없는 데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자신의 길을 가라.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낸 긴 길을 확인하며 호흡하라. 훌륭한 조언을 한 마디 건네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부수고 새로 태어나라. 유용한 조언을 건네는 희소한 자가 돼라. 이 세상은 늘 조언으로 넘쳐나지만 진실되고 실력있는 조언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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