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 것 중에 골라 읽는다, 라는 말이 있다. 책에 대한 격언 중 으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말이다. 이 말보다 더 현명한 말을 찾기 힘들 정도다.
무슨 이야긴가?
내 집에는 수천 권의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저 책들 다 읽었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아니, 라고 말하면 장식용이네, 라고 생각할 것 같고, 응, 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지? 나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이런 류의 질문, 나는 아주 싫어한다. 그런 건 묻지마, 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사람들, 꼭 물어본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이다.
사실, 책을 빌려 읽는다는 사람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것이야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공연을 몰래 숨어 들어가 보는 것보다 몇 만 배는 나쁜 행위다. 나, 몰래 숨어들어가서 그 뮤지컬 공짜로 봤어, 라고 말하는 이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 그런 방법이 있어? 그럼 나도 좀 그렇게 해 보게 방법 좀 알려 줘.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런 몰래관람객이 공연장에 숨어든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끔찍한 일이다. 한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 연출 등이 들인 공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짓은 하면 안 된다. 비싸지만, 돈이 들지만 그 값을 지불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래야, 그런 공연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리라. 유료 관객이 많아야 공연은 늘어날 것이고, 그 공연에 참여하는 이도 늘어나는 것이다. 공짜 관람은 공연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은, 거의 대부분이 작가의 삶의 정수가 녹아 있는 매체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어떤 작가는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 책 한 권 쓰려고 도망다니거나 망명을 가거나 은신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밥을 못 먹고, 생계를 꾸리지 못하고, 가족을 힘들게 하면서 쓴 책도 많다. 허영과 사치, 기만과 즐거움 속에서 쓴 책은 많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고통과 가난,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쓰여진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즐거움을 생각해 보라.
공짜로 책을 보는 걸 즐기는 이가 늘어난다면 책은 어떻게 될까? 책을 쓰려는 이가 많아지게 될까? 책을 쓴 이를 돕는 걸까? 이는 자기만 아는 도둑의 행위다. 평생을 공들여 그 책을 집필한 이를 기만하고 모독하는 행위다.
2만원이 넘는 책은 많지 않다. 물론 이 돈, 비싸다면 비싼 것이다. 그러나 책 만큼 싼 재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통 대학 학비로 내는 돈은 1년에 천 만원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파우스트나 전쟁과 평화 같은 책은 단돈 몇 만원이면 산다. 파우스트 한 권이 대학 1년 강의와 비교될 수 있을까? 그러니, 책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값싼 재화인 것이다 .책 한 권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책의 힘은 위대하다. 책의 효능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반드시 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그것은 작가에 대한 나의 작은 성의다.
나는 책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한번에 네다섯 권씩 구입해 서가에 꽂아둔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책을 꺼내 읽는다. 읽기 위해 책을 사는 것이고 산 것 중에 골라 읽는다. 10년 전에 산 책을 어느 날 문득 꺼내 읽는 경우도 많다. 책은 그런 것이다.
책의 속성, 책 구입의 의미를 오독하면 자기 인생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마치 현명한 소비활동을 하듯 책도 내가 지금 당장 읽을 것을 고르고 또 골라서 한 권 사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행동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물론 그것도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도시와 자연이 방문객을 위해 늘 열려 있듯 책도 마찬가지다. 책은 늘 거기 있어야 한다. 내가 때가 되면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한 줄의 문장이 지닌 위대함을 아는 이라면, 좋은 책은 미리 사 두어라. 그리고 때가 이르렀을 때 그 문장을 읽어라. 언제가 되어도 상관없다. 한두 번 빌려 읽는 것이야 상관없겠으나 빌려 읽는 게 생활화되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언제나 타인의 성의와 노고를 공짜로 얻으며 즐거움을 얻는 자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런 이는 타인의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서가를 만들어라. 자신만의 서가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돈을 불리기 위해 하루를 탕진하지만 지혜로운 인간은 서가를 꾸미기 위해 돈을 쓴다. 훌륭한 서가는 훌륭한 인간을 만들고 훌륭한 인간은 좋은 하나의 문장을 써낼 수 있는 법이다. 한 줄의 훌륭한 문장은 한 인간의 생을 뒤바꿔 놓는다. 세상에 그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도 드물 것이다.
오늘도 한 줄의 글을 쓰려 노력하는 이들이 세상 도처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들에게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아라.
나만의 서가를 꾸며라.
산 책들 중에 골라 읽어라.
아름다운 문장을 읽은 이가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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