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삼척동자도 알 만한 말이다. 남자들, 대개 결혼할 때 이런 식의 감언이설로 여자를 꾄다. 모양과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의미, 그런 맥락이다. 고생시키지 않겠다, 사랑해 주겠다, 변하지 않겠다, 성실한 남편이 되겠다, 너의 편이 되어 주겠다... . 별도 달도 다 따 줄 것 같은 기백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여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 남자로서는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짝짓기에서 함께 할 이성을 고를 선택권은 암컷에게 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웃거리고 매력을 펼치고 구애를 해도 최종 결정은 여성이 내린다. 남자들은 그 선택을 받으려 경쟁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여성을 쟁취한다.
문제는 결혼하고 나서 벌어진다.
살다 보면, 처음의 기백과 각오, 약속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내가 언제 그랬어? 식으로 어제 맘 다르고 오늘 맘 다른 것이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다. 들어 보면, 여자들이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성실할 것, 성실하게 집안일을 할 것, 아이 양육에 협력할 것, 동반자의 정신으로 아내를 아껴 주고 사랑해 줄 것, 가능하면 아내 편이 되어 주고 아내의 이야기에 공감해 줄 것, 어떤 상황이 와도 가장으로서의 용기와 기백을 잃지 않을 것. 뭐 그런 것들이리라.
나부터가 돌아보자면,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것도 하기가 싫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가사와 육아는 아내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행동해야 해, 라고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다른 건 몰라도 육아에 나, 최선을 다했다. 휴가를 내면 꼬박꼬박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 없이 셋이서 여행을 갔다. 그 결과는? 나에게 좋은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으며 무엇보다 아빠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받은 선물이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나의 있는 힘을 다해 쏟아 붓는다면, 그 결과는 다 내게로 돌아온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내가 다 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에 나와 친한 선배 하나는 기자 부부다. 이 둘은 틈만 나면 싸우는 걸로 유명하다. 내 선배는 까다롭고 자기 기준이 명확하고 매사에 엄격해서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다. 후배들은 무서워하고 선배들은 어려워하는 그런 사람이다. 문제는 이 선배가 가정 생활이 원만하지 않다는 데 있다. 만나면 늘 형수 비판하기에 바쁘다.
-협력적이지 않아.
-게을러.
-청결하지 않아.
-대화가 안 돼.
-가정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이야.
-이기적이야.
선배가 형수를 싫어하는 이유는 많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선배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배에게 말한 적이 있다.
선배, 그렇게 살면 선배가 불행하잖아요. 나는 선배가 행복하길 바라요. 선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형수한테 잘해줘 봐요. 여왕 떠받들듯이. 그리 하면 형수도 좋아할 거고. 형수가 어떻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냥 다 버리고, 선배가 다 해요. 나하고 살아주는 여왕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니, 선배 코웃음을 치면서 화를 냈다.
야, 미친놈아. 제정신이냐? 내가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이번 생은 난 망했어. 기대를 접었어.
선배는 말했다.
이 선배, 형수와 1년 반 정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미국에서 먼저 귀국한 선배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술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두 아들내미가 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아빠와 이야기도 잘 안 한다고 선배는 말했다. 선배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이게 벌써 2년 여 전 이야기다.
그리고 엊그저께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 선배는 낯빛이 좋지 않았고 조금 말라 보였다.
선배, 잘 지내요?
내가 물었다.
아니, 잘 못 지내. 몸이 너무 안 좋아. 술도 못 마셔. 못 먹는 게 너무 많아. 병원에서 .... .
거기까지만 듣고 우린 헤어졌다. 요지는 선배 몸이 많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매일 술로 잠에 든다고 할 때부터 나는 그러한 미래를 예상하긴 했다. 언젠가 그 후과가 올 텐데... 하고 걱정을 했다. 그게 현실로 온 것이다.
건강이야, 노력해서 되찾으면 되겠으나, 나는 선배의 가정사가 걱정되었다. 원만하지 못한 부부생활 중 건강까지 악화되었으니, 선배가 느낄 상실감이 걱정된다.
살아 보니, 부부는 늘 고비를 함께 넘는 동지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어느 부부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때 어떻게 협력하고 같이 그 위기를 넘어가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파트너십이 무너지면 도장 한 방에 이혼이다. 이혼은 너무 쉽고 가까이 있다.
여왕을 모시고 산다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떠받들자, 가끔 나 혼자서 생각한다. 물론, 실천이 어렵다. 그러니, 나 역시 문제투성이다. 늘 아내에게 혼이 나고 비판을 듣는다. 가끔은 욱 하고 저 가슴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기도 한다. 고비 고비, 또 고비다. 대체 이걸 어떻게 계속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도 한다.
하지만, 가정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선물하는 장소, 그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고통도 큰 것이다. 남성들이여, 십자가를 지라.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하라. 그러면 당신들의 가정이 곧 천국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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