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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교육에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지 마라

by 김정은

1. 경쟁

2. 꿈


꿈인가 경쟁인가?


부모는 아이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성장시키는 데 있어 명확하게 한 가지 노선을 결정해야 한다. 경쟁을 택할 것인지, 꿈을 가진 아이로 키울 것인지. 물론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개념은 아니다. 꿈도 경쟁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 교육 현실에서 이 두 가지는 상당 부분 다른 노선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


경쟁은 성적에 대한 압박이다. 양적 승부다. 선행 학습이다. 학원에 들이밀어 시간을 보내게 하는 전략이다.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받아내게 해 명문대, 아니면 조금이라도 등급이 높은 대학에 진학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노선은 근본적으로 아이를 피폐하게 만든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즐거움과 행복, 경험과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경험, 관계의 망이 단절된다. 이는 기억을 단조롭게 만든다.


경쟁 속에서는 추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쟁의 추억이란 그저 책상과 몇몇 학우들, 교실에 대한 단상만을 의미한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추억이 아니다. 추억은 양적 풍성함, 다양한 색체, 미묘하고 모호한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본질적으로 자유가 박탈된 조건에서 추억은 조합될 수 없다.


경쟁에 편입시킨다는 것은 추억을 희생시킨다는 의미다. 오늘날 20대가 된 성인의 가장 큰 문제는 추억의 결핍에 있다. 추억이란 하나의 장소다. 그들에게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없다. 이는 인간을 삭막하고 윤기라곤 없는 메마른 사막에서 살도록 강제한다. 추억이 없이, 그들은 세계를 사막으로 바라본다. 지나온 시간은 온통 사막이었고, 살아갈 공간도 역시 사막뿐이다. 이들에게 세계를 좀 더 나은 공간으로 개척할 의지가 결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사막에서 생존할 꿈을 꿀 뿐이다.


경쟁의 체험이란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만을 제공한다. 승리의 기억, 패배의 기억,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기억만이 유년기를 장식한다. 확률적으로 패배의 기억이 압도적이리라. 이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 자존감이란, 승리자의 감정이 아니다. 자존감은 근본적으로 승패와 무관하다. 자존감이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고 아는 것이다. 이는 타인을 알아가는 데 바탕이 된다. 자신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협곡과 봉우리, 능선, 평지와 구덩이, 물과 흙, 비와 햇살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자존감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타인을 배려하거나 타인을 도울 가능성은 적다. 자존감은 협력의 바탕이다. 자존감 없이는 공존이 위태로워진다. 각자도생이란 말은 우연히 나오지 않았다. 경쟁이란 삶의 조건 속에서 사막을 건너온 이에게 남은 것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혼자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승리는 인간을 자만심에 도취되도록 이끈다. 자신의 승리에 타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이 만인의 타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경쟁이 필연적으로 반교육적인 것은 거기에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존감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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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쫓도록 동기 부여하는 교육은 급하지 않다. 거기엔 경쟁이 있으나, 모두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한 가지 경쟁이 게임을 독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게임 속에서 다양한 승자가 배출된다. 꿈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이란 곧 선택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이들은 한 가지 게임만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술, 문학, 수학, 과학, 스포츠, 논리, 공예 등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을 고를 수 있다. 이미 정해진 틀에 자신을 끼워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맞게 고안된 게임을 고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중심이며, 철저히 맞춤 교육이다.


꿈 중심의 교육은 만인을 승리로 이끈다. 여기에는 기쁨이 있고, 자아 실현의 가능성이 높다. 꿈 중심의 교육에서 타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의 대상이다. 여기에서 타인이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조력자다. 나는 자존감을 가지게 되고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꿈 중심의 교육은 다양한 체험을 강제한다.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옷을 고르려면 다양한 옷을 입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여유와 자유 속에서 만끽하게 되는 시간은 풍성한 색채로 이뤄진 추억을 만들어 준다. 추억을 가진 인간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유년기를 소유한 자로서 자신의 아이에게도 그러한 유년기를 선물할 필요성을 안다.


꿈 중심의 교육이어야 경쟁도 의미가 있다.


경쟁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인 사회 속에 살다 보면, 다른 세계는 볼 수 없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모든 이가 한 가지 목적을 향해 경쟁하도록 만든다. 단 1명의 승리자를 만들고 만인을 패배자로 만드는 이 불행한 게임은 그렇게 유지된다.


이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최악의 부모다. 최선의 부모는 잘못된 것을 끊어주는 부모다. 더 나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그 길로 인도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의지와 역량이 필요하다. 작은 의지, 작은 역량으로 좋은 부모가 될 수는 없다. 단호한 의지, 큰 역량을 가져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그저그런 의지, 그저그런 역량을 지닌 부모는 그저그런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아이에게 좋은 신호가 아니다. 특별히 아이의 긴 미래를 볼 때 이는 아주 불행한 시그널이다.


우리사회에서 꿈을 주는 교육, 동기 부여를 하는 교육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선례도 없고 모범 사례도 드물기에 이것은 선택하기 난감하다.


우선은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하자.


1. 반드시 필요한 교육을 적당히 시킨다. (수학, 과학, 독서, 글쓰기 등)

2. 자유와 체험을 제공한다. (아이가 노는 시간은 아이가 스스로를 발견하며 성장하는 시간이다.)

3. 내 아이를 남의 아이와 비교하지 말아라. (내 아이는 남의 아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 아이에게 맞는 옷을 찾아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적절한 체험과 자유 시간, 관계, 놀이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대학을 못 가면 낙오하지 않을까?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가지는 두려움이다. 부모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아이들도 이 점을 두려워한다. 부모와 아이가 그룹을 이뤄 이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대학의 간판은 아이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거의 도움을 줄 수 없다. 미래의 개척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지능은 한 인간의 성공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그러나 대학 간판이 곧 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금 떨어지는 대학에도 높은 지능을 가진 이는 많다.


1. 자존감을 갖도록 하라. (이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2. 성실성을 중시하라. (성실성은 성공의 토대다.)

3. 즐거운 삶, 행복한 인간.


부모의 믿음과 신뢰는 아이가 자존감을 갖도록 만든다. 성실성은 훈련되어야 한다. 성실하게 했는데 점수가 낮게 나왔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밝은 것이다. 낮은 점수를 책망하지 말고 성실성에 대해 칭찬하고 성실성이 지닌 잠재력에 높은 점수를 줘라. 그런 아이는 미래에 뭐든 할 수 있는 아이다. 아이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노력하라. 영화를 보게 하고 음악을 듣게 하라. 여행을 가고 산책을 하라. 자유시간을 허락하라. 친구와 놀게 하라. 주변 어른과 친구로부터 칭찬받는 아이로 만들어라. 그것이 교육의 참된 목적이다.


무엇보다, 아이의 미래에 대해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아이 자신도, 부모도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아이의 미래다. 그럼 누가 이것을 아는가? 그것은 성인이 된 내 아이다. 성인이 된 내 아이만이 그 자신의 미래를 알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유년기에 미리 아이의 직업까지 결정해 주는 부모는 가장 어리석다. 아이가 평생 입을 옷을 유년기에 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미친 짓이며 아이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아이가 자신의 평생 동안 입을 옷은 그 자신이 성인이 되어 골라야 한다. 제대로 된 옷을 고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곧 안목과 시야, 통찰력을 갖게 해 주어야 한다.


명문대는 안목과 시야, 통찰력과 아무 연관성이 없다. 대학에는 똑똑한 이가 적으나 똑똑한 이 중 대학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이들은 많다는 역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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