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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an 24. 2024

결혼하면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남자

내가 언론 업계에 들어와 친해지게 된 동기 중 한 명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결혼했다. 그 친구는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고, 인문대를 나왔지만 미술과 음악, 클래식 등에 조예가 깊다. 주말이 되면 혼자 작업실에 앉아 (청승맞게)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나 클래식 음반을 들었다.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집안 전체가 의사 집안이고, 싱글은 자신뿐이었다. 부모님이 이 친구를 위해서 선 자리를 지속적으로 주선하는데도 잘 이어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싱글 기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선을 보더니 나 결혼한다, 라고 선포했다. 상대는 한두 살 연하의 내과 의사였다.


오 축하해!


우리 동기들은, 진심으로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어제, 동기 모임에서 그 친구는 깔끔하게 씻은 얼굴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등장했다.


나, 육아휴직 중이야. 지금까지 애 보다가 겨우 부인 허락받고 나온 거야.


친구는 즐거운 표정으로 테이블에 합석했다. 우린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기쁘게 식사를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나는 그 친구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내가 질문하자, 이 친구, 한 대 맞은 듯 몇 초 간 말을 하지 못했다. 1분쯤이 지났을까. 친구가 입을 뗐다.


네가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즉답이 안 나오는 거 보니까 아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하하.


그래?


그럼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야?


이 친구, 또 뜸을 들인다. 원래, 생각이 깊은 친구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늘 해오던 것들을 못 하게 되니까, 그 점은 좀 힘들어. 예를 들면 내가 등산을 좋아하잖아. 주말에 북한산 정상에 올라가서 위스키 한 잔씩 하고 내려오는 게 참 즐거웠거든. 요새 그걸 못 하니까 애 보면서 짬짬이 창문 밖으로 북한산 전경을 바라본다. 그거 알아? 북한산은 하루도 똑같지 않다는 거?


그래?


어, 한번도 똑같은 모습이 아니야. 북한산은 매일 풍경이 달라져.


그렇구나. 신기한 일이네.


나는 놀랐다.


그리고 레고 좋아하는데 레고도 못 하고 있지, 그림도 그렇고... 다 못 하니까. 그런데 웃기는 게 아이 보다가 아이 장난감에서 영감을 받더라. 그래서 얼른 아이패드에다 그림 그려. 그런 식이야.


친구는 말했다.


그래, 애 보다 보면 자기 생활이란 게 없지.


나는 동의했다.


그런데 내가 못 하는 부분 때문에 생기는 나쁜 감정을 내 아기가 다 채워주니까, 그 점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


오, 그거면 된 거 아니니?


그렇지.


우린 밤 10시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친구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는 결혼하면 일정 부분 취미를 포기해야 하는 기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은 참 불행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리라. 아이가 어느 정도 혼자 설 때까지는 아이의 보조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아니, 여자는 생의 전부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이리라. 남자는 단순히 몇 가지 취미를 포기하면 되나 여자는 삶 자체를 잃어버린다. 그러니, 아이를 출산하고 난 뒤 우울증에 빠지는 여자들이 많은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의 그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뿐, 여자가 될 수 없다.


여자와 남자, 부모가 되는 순간 이 둘 모두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대하다는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면 그것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는 법이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내 친구가 지금 이 시기를 잘 버텨내길 바란다. 친구의 제수씨는 조만간 복직한다고 한다. 얼마나 설렐까? 이제 아이로부터 아주 조금은 벗어나서 자기 삶을 되찾을 때가 온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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