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딸이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by 김정은

가장 좋은 아빠란, 이런 아빠다.


자신의 어렸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기 아이를 대할 수 있는 아빠.


나는 고맙게도,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을 수 있어, 실천했다. 아빠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하나가 어른의 역할, 다른 하나가 친구의 역할이다. 아빠는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몇 개의 역할을 해내는가, 가 그 아빠의 능력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른 역할만 할 수 있다면 50점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친구 역할까지 한다면, 80점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을 듣는다.


내 아이가 원해서.


그래서 학원을 보낸단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고, 이것저것을 한단다. 반은 맞는데 반은 틀린 이야기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 아이는 망나니가 된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종일 먹을 수도 있고 종일 게임만 하는 게임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 아이는 지도의 대상이지 성장한 개인이 아니다.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이 뜻을 존중한다는 것이 곧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믿는 것이다. 아니, 틀렸다. 아이 뜻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라는 말에 가깝다. 예를 들어 아이가 3시간 공부했는데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 휴식을 주고 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 이런 것이 아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보통의 부모들은 아이의 감정을 읽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도 한도 없이 말한다.


이거 사 줘.


이거 하고 싶어.


이거 보고 싶어.


놀고 싶어.


쉬고 싶어.


자, 이 말을 다 들어준다면, 아이 뜻을 존중해서 이를 다 허용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필요한 것을 습득하고,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러니, 아이 뜻을 존중한다는 말을 오독하면 안 된다.


흔히 하는 말, 즉 내 아이가 원해서 학원을 보냈다, 식의 말은 사실 이 뜻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인데, 나도 원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겠다는데, 학원을 가겠다는데 마다할 부모는 없다. 돈이 허락하는 한 수십 개라도 학원을 보내려 하는 게 한국 부모들이다. 그러니, 솔직해져야 한다. 부모 본인이 원하는 것을 아이도 원한 것이라고!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한국 부모들이 대개 어기는 중요한 룰이다. 공부의 한계. 적정한 공부 시간. 공부와 놀이, 공부와 관계, 공부와 휴식의 비율을 적절하게 가져가는 것. 이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과거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공장에 보내 착취당하도록 허용했다. 당시 영국 아이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일찍 죽었다. 이들은 부모로서 적절한 자기 역할을 방기한 것이다.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지금 한국 부모들이 산업혁명 시기 영국 부모와 동일한 실수를 범한다. 한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 착취당하도록 허용한다. 지금 한국 아이들은 장시간 학업에 시달리고, 마음과 감정이 병들고 있다. 이들은 건강하고 목표를 가진, 진취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기 힘든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20대 학생들 중엔 자기 진로를 몰라 방황하고, 자기소개서 한 장 스스로 쓰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허다하다. 이것은 극심한 편식의 결과다.


학습 - 놀이 - 가족 친밀감 - 자존감 - 경험 - 자아실현 - 안정감 - 신뢰


자, 우리 아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제공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대개의 한국 부모들은 학습만 제공한다. 그러고 나서는 부모 역할을 다한 것처럼 착각한다.


학습 - 학습 - 학습 - 학습 - 학습 ...


도대체 이 나라가 정상인지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다.


그러지 말아라. 모든 건 적정량이란 게 있다. 도가 지나치면 안 하니만 못한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적정한 학습시간은 내 생각에 초등생은 6시간, 중학생은 7-8시간, 고등학생은 10시간을 넘으면 곤란하다. 최대치가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유럽의 경우를 보라. 아이들은 학교에서조차 학습량을 과도하게 요구받지 않는다. 그들은 놀이 중심, 관계 중심, 체험 중심, 자연 중심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유럽의 아이들보다 경쟁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내 주변만 본다면,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없다. 그것은 앞의 쥐를 따라 차례로 절벽에 떨어지는 레밍 떼 같은 것이다. 넓게 보고 멀리 봐야 한다. 유럽의 경우, 미국의 경우를 두루 살펴봐야 올바른 육아법, 학습법이 나온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아이들은 심각한 학습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가 원하는 것, 이 말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그것은 대부분 감정에 관한 것이다. 아이의 감정을 살피고 아이가 행복하고 자신감 있게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것, 그것은 내 아이가 올바른 인격과 정체성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치고 돕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도 곤란하고, 각각 잘못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도 곤란하다.







*구독을 부탁드립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