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나는 금명이
길을 걸을 때에도 점심에 회사 사람들이랑 밥을 먹을 때에도 온 세상에서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가 들려왔다.
몰아서 보고 싶은 욕심 반, 귀찮은 마음 반으로 4부까지 총 16화가 모두 공개된 후에야 1화를 틀었다. 사실 알고리즘이 일을 너무 잘해주는 바람에 SNS를 통해서 이미 감동 포인트도, 재미 포인트도 다 알면서 보는데 남들만큼 감흥이 있겠나 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그러나 웬걸 4화쯤 되니 드라마 속 금명이 - 극 중 애순의 딸이자, 아이유 역할 - 가 나와 너무 똑 닮아서 보는 동안 너무 아파하고, 너무 미안해하며 봤다.
극 중 금명의 자취방에 반찬을 넣어주러 온 애순이의 잔소리에 금명이 별안간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며 '궁상이 공치사야?'하며 화를 낸다. 이후 흘러나오는 금명의 내레이션.
엄마를 찌르면 똑같은 가시가 내 가슴에도 날아와 꽂혔다.
그러게 왜 그럴까. 부모가 의도치 않게 나에게 작은 생채기라도 내면, 다른 데서 얻었던 훨씬 큰 상처가 꼭 같이 건드려진다. 그러면 별안간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며 발끈해서는 기어이 그들에게도 상처를 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마치 그게 자식의 권리인 것처럼 내가 그랬다. 그렇게 부모 가슴에 상처를 내면 자식 가슴에도 상처가 날 걸 알면서도 자꾸만 못돼졌다.
그렇게 금명이도 나처럼 가끔 가족을 찌르고 대부분 그들을 안쓰러워하며 시간이 흘러서 결혼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틀리면 빠꾸'라는 관식이 -극 중 금명의 아빠, 박해준 역- 의 명대사를 그가 식장에 입장하기 전에도 또다시 금명에게 외치는 바람에 기어코 그녀를 울렸다. 그런 아빠를 보며 그녀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아빠가 그렇게 서있는 동안 아빠에게만 눈이 내렸나 보다.
아빠의 겨울에 나는 녹음이 되었다.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었다.
이 드라마 안에서 가장 울림이 컸던 대사.
내 인생 가장 빛나는 지금이, 그들의 푸름을 내가 다 먹어치운 결과임을 이 내레이션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걷는 법, 먹는 법도 모르던 아가가 이렇게나 커서 이제는 되려 그들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나이가 된 것은 내가 그들의 시간을 다 먹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자꾸 잊는다. 내게 선택권이 없이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났지만, 동시에 그 이유 하나로 그들은 반평생을 나에게 내어주었다. 그들 인생에 가장 빛나고 값진 청춘이라는 선물을 나에게 그냥 주었다. 이미 충분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살기 힘겨울 때마다 자꾸 잊는다. 잊어서 가끔 생채기를 내고 또 후회한다.
내가 극 중 금명이와 똑 닮은 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려면 금명이처럼 결국에 성공해내야 한다. 멋지게 늙은 중년이 되어서 그들과 함께 늙어가는 멋진 자식이 되어야 나의 이야기도 최소한의 후회만 남긴 채 무사히 마무리 될 것이다. 그렇게 지난 날 그들 안에 자꾸 냈던 생채기를 아물게 해야 하는 자식으로 커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폭싹 속았수다'는 내게 결국 그런 결심을 안겨준 드라마였다.
부모님께 감히 '폭싹 속았수다' 할 수 있는 자식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