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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남 Sep 19. 2023

(소설) 개들의 전쟁 / 제10화(마지막)

마지막 화

7


현수막이 걸린 지 사흘이 지났으나 주민들은 무엇이 걸려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민 가운데 간혹 낯익은 사람이 지날 때면 반갑게 달려가 자초지종 엉너리까지 치면서 서명을 권해 보았으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나가던 나이 든 할아버지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거냐면서 날도 더운데 쓸데없는 짓거리 그만두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였고, 또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의 한 아주머니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먼발치에서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관리실 직원이 나타나 현수막을 철거하라고 몇 번 만류할 때는 심 대리가 가르쳐 준 대로 시위법을 들어 가며 쫓아버렸다. 자기 세상인 양 시도 때도 없이 당당하게 짖어대는 개 소리를 단지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날이 밝으면 나와서 긴 여름 해가 넘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문자를 보내 격려하는 딸과 때가 되면 찬합에 밥과 반찬을 들고 나와 중중대며 한숨을 쉬는 아내가 나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렇듯 아무 성과 없이 또 하루가 지나가던 오후 무렵이었다. 1동 사는 에어로빅댄스 강사가 상가에 볼일이 있어 가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건방지다고 할 만큼 허리가 너무 꼿꼿하고,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으나 나는 반갑게 맞았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요. 눈을 크게 뜨고 묻던 강사는 내 설명을 듣자, 그런 일은 주민이 나설 게 아니라 관리실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알지게 물었다. 

왜 찾아가지 않았겠어요? 몇 번씩 가서 따졌지요. 

뭐래요?

그럴 때마다 조치하겠다고는 했지만 말뿐이었어요. 오죽 답답하면 이렇게 직접 나섰겠습니까? 아니, 개 소리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는데 주민이 어떻게 관리실을 믿겠어요? 

맞아요. 자기들이 누구 덕에 밥 먹고 사는데….

길게 늘어뜨린 강사의 노란 머리가 내 눈에는 유난히 도도해 보였다. 

그날 자진해서 연판장에 서명한 강사는 다음 날엔 아침마다 공원에서 에어로빅댄스를 하는 회원들을 몽땅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못했다. 아줌마들의 힘이 이런 건가, 비로소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잠시 뒤 찬합을 가지고 나온 아내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아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나는 하얀 앞니를 모두 드러내고 웃는 아내의 얼굴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강사는 약속을 지켰다. 긴가민가했으나 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정말 여러 명의 여자를 데리고 씩씩하게 나타났다. 길고 큰 손가방 하나씩 들고 우르르, 몰려든 여자들은 모두 여덟 명인데 연령대가 같지는 않았다. 물론 대부분이 강사 또래였으나 그중에는 삼사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도 두어 명 끼어 있었다. 그녀들을 보는 순간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솟았다. 

몸을 흔들며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바람에 잠시 혼란스럽기는 하였으나 여자들은 사전에 강사한테 상황을 들어 알고 있다는 듯 모두가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이었다. 서로 다투어 가면서 서명을 마친 그녀들은 곧장 관리실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소장은 도대체 뭐 하는 작자야?

복지부동도 유분수지, 이런 민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옷 벗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때 입주자대표는 또 뭐 하고 있는 거야?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여자들의 입에서는 막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들이 중구난방 쏟아 내는 그 막말들이 내 귀에는 하나같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영주 엄마도 개 소리 들었어?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갈색 머리 여자를 돌아보았다.

듣기만 해? 난 그 개도 봤어. 공원에서 마주쳤는데 시커먼 게 정말 송아지만 하더라니까. 얼마나 무섭던지….

두 팔을 한껏 벌린 영주 엄마란 여자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말이 끝나자 이번엔 긴 생머리를 뒤로 깡똥 묶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저도 들었어요. 우리 집은 창문이 돌아앉아 잘 들리진 않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들려올 땐 정말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아이들도 짜증을 부리고. 그래도 저는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까…. 

그러니까 이건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반드시 막아야 해. 아파트는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잖아? 공동생활엔 질서가 있어야 하는 거거든. 그 질서가 뭐겠어? 개보다는 입주민들의 인권이 먼저라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관리실이 매일같이 경고 방송을 내보내면 제가 아무리 철면피라도 무슨 조치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나는 그녀들에게 전날 강사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개 주인이 프로레슬러 같아서 왜소한 나 혼자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웠다는 것과 송곳니가 유난히 날카로운 그 검은 개의 모양과 당장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매서운 눈매 그리고 그동안 찾아다녔던 이웃들의 무관심과 그것 때문에 지병이 더 악화한 아내의 고통 등을 알렸다. 또 그동안 내가 관리소장에게 여러 차례 주지시켰던 공동주택관리법에 기재된 층간소음 방지법에 대한 것을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녀들은 내 말을 하나도 흘려듣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말을 마치자 숨을 한 차례 길게 내뱉은 강사는 내 등을 두드리면서 내일은 회원들을 더 많이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오늘, 안 되면 내일, 내일 안 되면 모레, 이런 일은 길게 잡고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지쳐 쓰러지면 지는 거라고 했다. 

법, 그거 믿지 말아요. 그거 믿다가는 지레 늙어 죽어요. 이런 건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어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렇잖아요?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문득 음성 공장의 심 대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매일 방송하고, 그래도 개가 또 짖으면 이번엔 단지 안의 남자들을 모두 동원해서 그 집 앞에서 아주 며칠이고 텐트를 칠 거야. 우리가 누군데! 

강사는 자신 있다는 투였다. 강사가 허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자 그때까지 떠들며 부산을 떨던 여자들이 모두 따라 웃었다. 

한동안 웃고 떠들던 여자들은 잠시 뒤 강사가 길거리로 내려서자 정말 우르르, 관리실을 향해 몰려갔다. 나는 마스크를 단단히 고쳐 쓰고 의기양양하게 잰걸음을 놓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현수막을 내릴 날이 예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용기를 내어 나서긴 했지만, 여름날 땡볕 아래에서 자리를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악물고 버텼다. 지나가는 주민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지쳐도 지친 기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심 대리 역시 그런 심정으로 지금 동굴 같은 공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득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그의 처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후가 되자 흐렸던 하늘에서 마침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가뭄이 이윽고 끝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맞아 보는 빗방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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