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김 선생의 집을 나선 나는 이번엔 발걸음을 우리와 같은 동 303호 최 사장네로 돌렸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준 그의 부인을 보고서야 나는 그 시간대면 그가 출근한다는 사실을 새삼 되씹었다. 사전에 전화를 먼저 주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이 양반은 밤늦게나 되어야 돌아와요. 그의 아내는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는 눈빛이었다. 헛걸음을 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통일로 부근에서 주차장까지 갖춘 제법 규모가 있는 한정식 전문식당과 또 시내 번화가에서 룸이 여럿 딸린 고급유흥업소를 운영하는, 단지 내에서는 몇 안 되는 알짜배기 사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살이 좀 심한 편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그는 만날 적마다 울상을 지으면서 코로나 때문에 요즈음 경제 사정이 아주 나빠졌다는 것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는 형님이 제일 부럽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봉급이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화장지 한 롤을 팔기 위해 발품을 얼마나 팔고 다녀야 하는지를 그가 알까. 물론 지금은 그나마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어쩌다 단지에서 회식 자리가 벌어지면 계산은 항상 그가 도맡았다. 명절 때 단지의 경비원들에게 양말이라도 돌리는 사람 역시 그였다. 그런 까닭에 단지 안에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더구나 무조건까지는 아니어도 내 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는 편이어서 더더욱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내가 눈에 불을 밝히고 있을 터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이번엔 미란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 미란이 할아버지는 그 집에 당도하기 전 도로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그는 나와 마주치자 검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활짝 웃었다. 작달막한 키 탓일까, 아니면 유독 배가 볼록 튀어나온 탓일까. 엘에이라는 대문자가 크게 새겨진 흰 야구모자로 대머리를 가린 그가 웃는 모습은 꼭 그림에서 본 달마대사 같았다.
어쩐 일인가?
그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놓인 벤치는 옆으로 가지를 길게 뻗은 느티나무가 햇볕을 가려 주어서 이야기를 꺼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본론을 꺼낼 기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팔십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찌나 말이 잰지, 내가 미처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늘 열정적으로 쏟는 이야기란 이혼한 아들이 맡기고 가버린 미란이 양육 문제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정치가들을 비판하는 것이거나 사회 문제 또는 마찰을 빚고 있는 국제 분쟁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서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가는 귀가 먹어 대꾸하는 사람이 늘 목청을 높여야 했다. 그날 그가 첫말을 꺼낸 것은 확진자가 급증하는 코로나 문제였다. 기회를 엿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데 그는 평소와 똑같이 말끝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인사치레로 머리를 주억거리던 나는 그가 물을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곤혹스러웠다.
이러다가 정말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거, 누가 예언을 벌써 오래전에 했다잖아. 노스트라다무슨가, 뭐신가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
글쎄 말이에요. 하긴, 그것 때문에 세상이 더 뒤숭숭해진 건 사실이에요.
내 생각에는 그걸 지구에서 없애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고, 앞으로는 그걸 감기처럼 늘 끼고 살아야 할 것 같아. 티브이를 보니까 어느 박사도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때?
그럴지도 모르죠. 이렇게 쭉 계속된다면.
마스크를 고쳐 쓴 나는 여전히 언제 기회가 올까,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꽃무늬가 있는 긴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갈색 털을 지닌 조그만 강아지를 안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쳤다. 말을 계속 이어 가던 그도 그 강아지와 여자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햐, 그놈 참 예쁘게 생겼네! 그가 감탄사를 내뱉자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 요즘 개 짖는 소리 때문에 힘들지 않으셨어요?
어렵게 운을 뗀 나는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그의 곁으로 바투 다가가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였다.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으셨냐고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그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들었지. 내가 어디 귀먹은 사람인가, 그 소리도 못 듣게.
아주 시끄럽지요? 동네가 온통 떠나갈 만큼.
나는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활짝 펴면서 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잠을 설친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약간이긴 해도 가는 귀가 먹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면 그쯤도 예상하지 못하고 찾은 내 오산이었다.
큰 개인가 봐, 소리가 제법 우렁차더구먼.
시끄럽진 않았어요?
시끄럽긴….
그는 내 얘기보다 그 개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다음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