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텀 히말라야 산행기_2
'Excuse me'
새벽 5시가 되자 민박의 종업원이 문을 두드려 알람 해주었다. 사실 이미 4시부터 잠에서 깨어 많은 생각을 스치고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둡다. 시작될 여정에 대한 설렘 위에 두려움이 맥주거품처럼 얹혀있다. 미리 나가 체조를 할 정도의 산뜻한 기분은 아닌 것이다.
잠시 후 대면한 잘 웃는 인상의 가이드는 거부감이 없었다.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는데 가정이 있는 남자다. 이름은 크리슈나. 인사를 하고 내 짐의 절반정도 무게를 크리슈나에게 맡겼다. 준비가 되자 어두운 카트만두의 거리로 나섰다.
여행의 출발지인 베시사하르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을 찾아가는 길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에 가깝다. 불빛이라곤 자동차에서 나오는 먼지 자욱한 헤드라이트 정도.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개들이 눈에 더러 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조금 걸으니 인적이 모이는 길로 합류하고 등교를 위해 나선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들리는 요란한 음악은 가까워지며 불경과 댄스음악을 믹스한 이상한 음악으로 변한다. 크리슈나가 나의 표정을 읽고 얘기한다. '저건 네팔사람들의 모닝워크야.' 근처 사찰에서 군중들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버스터미널이라고 얘기했지만 조그만 공터에 버스가 몇 대 주차된 수준이다. 한쪽 판자때기 집 앞에는 정비에 쓰는 듯한 타이어가 이리저리 쌓여있는 초라한 행색. 누가 이걸 버스터미널이라고 보겠는가? 알아볼만한 픽토그램은 전무하다. 대략 30여분 넘게 걸어온 것 같은데 아무리 능숙한 여행가라도 이 길을 혼자서 찾아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표지판도 없고 어디 물어보기도 쉽지 않다. 여행객들이라도 많다면 지표 삼아 따라가겠지만 여기까지 걸어오며 본 여행객은 지나가다 스친 서양인 몇 명이 전부다. 동양인은 아예 볼 수가 없다.
버스가 준비되어 올라타 자리에 앉으며 이 특유의 인도식 페인팅이 칠해진 버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웬걸 와이파이가 가능하다고 적혀있다. USB를 통한 충전 역시 가능하다. 센세이션 한 느낌. 백인 여행객 몇 명이 버스에 오르고 옥탑에 짐을 가득 채운 버스는 자리가 모자라 복도까지 짐을 채운다. 후에 타는 네팔리들은 짐 위로 건너가느라 난리판이 벌어진다. 결국 버스는 더 넣을 수 없는 상태가 돼서야 준비를 마친다.
이내 뜸을 들이던 버스는 천천히 움직여 카트만두의 중심을 관통해 외곽으로 나아간다. 흙먼지와 하나 된 건물들의 색상에 더해 일과가 시작되어 활기를 차리는 네팔리들의 다양한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으며 연신 카메라를 누르곤 한다. 그러한 풍경도 심드렁해질 때즈음 시내를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협곡이 펼쳐진다. 굽이치는 협곡은 중경, 원경이 레이어 되어 생전 본 적 없는 형태의 스케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버스 위에 어떤 안전장비도 하지 않고 앉아가는 네팔리들. 인터넷에서 접한 인도사진 속 기차에 올라탄 그 스타일. 몇 시간을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버스 위에 앉아가는 네팔리들을 보며 생소함이 원료인 여행의 농도는 한층 짙어진다.
도로옆으로 더해졌던 작은 물줄기는 이내 점점 커지더니 불투명한 에메랄드 빛 회색으로 빛난다. 디슐리 강은 서쪽으로 향하는 버스의 옆을 따라 함께 달린다. 수목의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네 시골의 풍경과도 비슷하고 또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어렸을 적 보았던 여러 풍경과 겹치는 듯한 모습을 보게되어 왠지 모를 편안함도 느낄법하다. 가끔 각도가 맞을 때 보이는 멀리서 손짓하는 설산은 영험해 보이기 이를 데 없다. 스치는 마을들은 문명의 이기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형태로 그들만의 시계를 달리고 있는듯하다. 지나며 보이는 일상적 풍경들도 한번 즈음 여기서 하루이틀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이국적. 지프를 대절해 원하는 대로 이동하는 형태의 여행객들도 있는데 새삼 그들이 부러웠다. 중간중간에 내려 둘러보고 싶은 곳들이 많기에.
들른 휴게소에서 네팔리들과 함께 현지식인 달밧을 먹었다. 전형적인 인도식인 오른손을 이용해 다들 식사를 하지만 일행 내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보고 가게 주인은 스푼과 포크를 가져다줬다. 땡큐.
달려오는 내내 마을을 지나며 봤던 젊은 네팔리젊은이들이 사회 속으로 나오기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깊은 시골에서 서울로 한양으로 나가자면 수고가 들기 마련이지만 네팔은 카트만두 일대와 스치며 본 외곽의 격차가 더 크다. 나무판잣집정도에 살며 기초적인 가내수공업 정도의 벌이를 하는 듯 보이는 농가들에서 태어나 만약 우리나라 같은 국가의 대학에 진학할 정도가 되는 것은 상상이상의 문명적 갭이 느껴진다. 그 정도면 개천에서 용 난 수준을 넘어서는 듯한데 새삼 한국의 모든 편리함을 누리는 삶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비단 며칠 전에만 해도 나는 그 문명의 굴레안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다시 두 시간여를 달려 나보다 농도 짙은 여행을 하는 듯한 서양인 트랙터 두 명을 태우고부터는 안나푸르나 산세가 가까워지며 길이 좁아진다. 탁 트인 시야도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가축들이 자주 길에 나와 부딪힐 듯 지나기도 한다. 와중에도 저렇게 진열해 놓으면 과연 누가 사줄까 싶은 잡화점은 계속해서 지난다.
마침내 도착한 베시사하르는 그간 통과하던 동네에 비하면 커다란 곳이다. 안나푸르나 관문의 시작이라 마을인구도 많고 체류 중인 트랙터도 더러 눈에 띈다. 산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등록, 신고절차를 이곳에서 처리한다. 나는 여분일정 없이 바로 트레킹을 출발하는 스케줄이라 이곳에서 바로 지프를 수배해 탑승하고 출발하려 했으나 쉽게 지프는 수배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일정을 지키기 위해 지프의 짐칸에 얹혀가기로 했다. 30분 정도를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는 역시나 틀리고 두 시간여를 지프에 실려 비포장길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디 바자르에 도착했다. 분명 이곳은 정취적으로 내 외할머니 댁이었던 경북 거창 정도의 풍경인데 해발고도는 1850미터를 가리키고 있다. 로지(산장)에서의 숙박도 처음이다. 분리된 방갈로 형태의 숙박시설은 합판 따위로 칸막이를 해놓은 것에 불과한 목재구조물이다. 샤워를 간단히 하고 부속된 작은 식당에 앉아 티를 한잔 하며 잠깐의 여유 아니 10시간을 달려온 간절했던 여유에 긴장을 풀어본다.
젊고 패기 넘치는 20대도 아니고, 삶의 황혼이 젖어드는 40대도 아니다. 'Too young to hold on, too old to breakfree and run'이라는 노래가사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니 거의 무모한 짓이었다. 상황적으로 따져보자면 나는 이럴시기가 아니었지만 우려를 무릅쓰고 이렇게 먼 곳으로 왔다. 무엇을 얻기 위해? 자기만족? 여행이 진행될수록 두고 온 것들의 생각들을 별로 들지 않는다. 이 오지 히말라야 산속은 그런 현실적인 생각으로부터 아예 나를 분리해 놓는 느낌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차를 열 시간 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단번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도 없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