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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고들꽃 Feb 09. 2022

겨울눈

미래를 준비하다

                                                            산수유 겨울눈

가시칠엽수 겨울눈                               마가목 겨울눈                                             백목련 겨울눈


 

  

  나무는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부터 시작해 가을까지 이듬해 봄에 꽃이 될 꽃눈, 잎이 될 잎눈, 꽃눈과 잎눈이 함께 들어있는 혼합눈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는 이것을 겨울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월동아(越冬芽)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마다 겨울눈의 모양과 색깔이 다르듯 한겨울 추위에 겨울눈을 보호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비늘잎에 솜털이나 진액이 싸여 있는 것도 있고, 부드러운 털로 여러 번 감싸는 것도 있고, 자동차의 부동액처럼 끈적끈적한 성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엄동설한의 겨울은 모든 생물들에게 참으로 혹독하고 잔인한 계절이다. 눈보라와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 잠시 성장을 멈추고 저마다 특별한 방법으로 겨울을 나는 지혜들을 총동원시킨다.

 넓은 잎을 가진 나무는  가을에  잎사귀를 모두 떨어뜨려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하면서 지탱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고, 먹이활동이 용이하지 못한 동물들은 겨울잠을 택했으며, 방석식물은 땅바닥에 바짝 붙어 지열을 이용하고 추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햇살 가득한 봄이 되면 생명감은 제로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앙상하기만 했던 이 가지 저 가지의 겨울눈 속에서 뭉쳐져 있던 잎눈이 벌어지며 아기 손톱만큼 한 잎이 나오고, 꽃눈이 터지면서 꽃받침, 꽃잎, 암술과 수술이 완벽하게 갖춘 모습으로 개화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신비에 그저 감탄만 할 따름이다.

 봄이 되면 귀룽나무는  가장 먼저 잎을 내밀어 연둣빛 구름이 뭉게뭉게 펼쳐진 것 같은 숲을 만든다. 그래서 그림에 문외한인 나를 일 년에 딱 한 번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든다. 봄의 전령사라고 불리는 산수유, 백목련, 매실나무, 개나리는 잎보다 꽃망울을 먼저 터뜨려 울긋불긋 꽃의 수채화 작품을 들판 곳곳에 전시한다.      


                                                          준비하자  


 여기저기에서 꽃이 피고 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숲이 초록 초록해지고 봄의 향연이 시작되면 사람들 가슴엔 화사한 설렘 가득 담기고, 상큼한 꽃향기 공중에 퍼지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매년 찾아오는 봄마다 우리가 그런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소리 없이 자신의 맡은 바 일을 부지런하게, 완벽하게 준비를 해 둔 나무의 덕분이었음을 이젠 알게 되었다.  

 새봄이 되어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난해 여름부터 나무가 철저하게 빈틈없이 준비한 결과였다는 것을 내 나이 20대에 알았다면 내 삶이 좀 달라졌을까?


 결혼을 한다는 것은 곧 어른이 되는 것이고, 그것엔 무한한 책임과 헌신이 뒤따른다는 엄연한 공식이 있는 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나는 철없이 결혼을 감행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혼란 속으로 빠지며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고 결혼 전 보았던 남편의 모습은 어디 가고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고구마가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돈을 아끼느라 사 먹지 못할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신혼살림을 시작한 집은 방 한 칸에 부엌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라 태어날 아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다. 목돈이래봐야 지금으로 치면 너무나 적은 액수이지만 그때엔 정말 큰돈이었다.  

 1980년대에는 회사에 취직을 할 때도 재산세를 어느 정도 낼 수 있는 사람이 취업자의 신원을 보장하고 어떤 일이 발생할 시 책임을 지겠다는 보증인이 필요했던 시절, 남편이 취직은 했지만 사회초년생에게 은행 문턱은 너무 높아 대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럴 즈음 시댁의 사촌형님이 낙찰계의 계주(계를 조직하여 관리하는 사람)를 하면서 내게 낙찰계에 계원이 되어 목돈을 융통하라는 귀띔을 해 주셨다.  

  낙찰계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략 설명을 듣고 낙찰계에 들었다. 낙찰계는 자금융통을 위한 계로 여러 명이 계원으로 되어 있고 각각 개인이 원하는 번호를 정해서 곗돈을 받았는데 앞 번호는 곗돈을 빨리 받는 만큼 원금을 다 못 받았고, 계주나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뒷 번호를 낙점해서 원금보다 곗돈을 많이 가져가는 구조였다. 그렇지만 목돈이 필요했던 나는 그때부터 낙찰계에 들어 제일 앞 번호로 곗돈을 타서 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 방 한 칸과 좁은 부엌이 딸린 집을 전세금 백만 원에 월세 3만 원에 시작하여, 그다음 해는 방 한 칸이지만 방이 조금 넓어지고 부엌도 조금 더 넓은 집을 2 백만 원에 월세 5만 원, 그다음 해는 여전히 방은 한 칸이지만 새로 지어 깨끗한 다세대 주택으로 전세 300만 원에 월세 5만 원 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다음 결혼한 지 4년이 되던 해에는 처음으로 방 두 칸에 손바닥만큼 작은 거실이지만 싱크대도 있었고, 3인용 식탁도 넣을 수 있었고, 제일 큰 변화로는 화장실을 우리만 쓸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그 집을 전세로 계약하고부터는 가슴이 어찌나 설레던지 이사하는 날까지 너무 좋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집 앞 공원을 걷기 위해 나가던 그날은 기분이 하염없이 아래로 처져 힘이 빠지는 날이었는데 하늘까지 흐려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집 앞 횡단보도를 지나 공원에 들어서자 익숙해진 방법으로 왼쪽으로 꺾어 크게 공원을 걷다 한강을 바라보니 썰물 시간인지 물도 다 빠져나간 강바닥에 모래톱이 다 드러나 내 기분만큼이나 썰렁했다.

 평소 같으면 빠른 걸음으로 그냥 지나치곤 했던 벤치 앞을 기분도 꿀꿀하여 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잠시 앉았다. 늘어진 몸을 스트레칭하기 위해 상체를 구부리다가 벤치 등받이에 붙어 있는 글귀를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올리버 W. 홀스 -     


 누구의 아내, 엄마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며 내 이름으로 된 우편물을 하나라도 받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내 이름으로 활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 어렵던 시절들을 잘 살아낸 듯싶다. 그렇지만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이 먹기 전에 또 다른 것에 도전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 보기로 해 본다. 현재의 내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변화된 내 모습,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달라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7센티가 넘는 눈이 내려와 나무의 겨울눈 위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았다. 나무의 겨울눈은 비늘 옷과 털옷을 겹겹이 입고 완전무장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얼마 남지 않은 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남부지방에선 매화가 벌써 개화하기 시작했다는 봄소식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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