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 덕에 받은 위로

by 솜다


물론 내가 이십 대는 아니지. 그래도 아직 삼십 초반인데, 대상포진에 걸려버렸다. 스트레스니 수면 부족이 그 이유라고 한다. 의사선생님은 초등학생 시절 수두라는 이름으로 날 찾아왔던 무슨 조스터 바이러스가 찌그러진 채로 숨어있다가 면역력이 약해진 틈을 타 기어 나오는 거라고 했다. 등과 옆구리에 조그마한 발진이 생겼고 가렵길래 처음엔 그저 모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정강이 쪽에 두드러기처럼 올라왔길래 놀란 마음 진정시키며 네이버를 켜서 검색해 봤다. 대상포진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늦게 가서 얼굴에까지 올라오면 무진장 낭패다. 그 길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내과였다. 강남에 한복판에 위치한 병원답게 역시 차가운 대리석 인테리어가 디폴트였고, 갑자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온 게 후회됐다. 3초간 위축됐으나, 짜부라져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 '처음 왔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접수처로 향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금방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병원의 시크한 외관과는 다르게 의사선생님은 엄청난 수다쟁이셨다. 대상포진의 뜻부터 시작한 TMI 대잔치는 내 응원으로 끝을 마쳤다. 뭐가 그리 힘이 드냐고, 힘내라는 선생님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약을 일단 제일 약한 걸로 먹어요. 초기니까. 안 좋겠다 싶으면 다시 오세요."

"네네, 잘 챙겨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틀에 박힌 말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뒤를 돌아 진료실을 나오려는데 선생님은 두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이며 화룡점정을 찍으셨다.

"파이팅!"

"풉-"


병원을 나와 약을 타러 갔다. 쿨톤의 립스틱이 인상 깊은 멋쟁이 약사 할머님이셨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사를 받고 말고는 그 사람 몫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대신 이게 말 그대로 '주객전도'인가 싶었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갑일까, 을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한지 1분도 안 지났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부르니까 갔다.

"젊은 사람이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네?"

"푹 쉬고, 스트레스받으면 안 돼. 약도 비싼 거니까 다 먹어야 해. 이왕이면 알람 맞춰놓고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좋아."


지난주에 남자친구와 두 번이나 싸우고 밤을 새운 적인 있긴 하지만, 나름 건강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회사에서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닐 거라고 자위했고 적당한 스트레스는 일상에 동기부여라는 나름의 밝은 면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힘든 게 딱히 없는데, 처음 본 두 사람에게 저런 값진 위로를 받아도 되는지 당황스러웠다. 하긴 위로를 받을 사람에게 '혹시 위로받으실래요?'라고 물어보고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누군가 저렇게 물어온다면 어느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위로마저 물어보고 줘야 하는 세상은 다행히도 아직이다. 사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질문이지만 그런 질문을 주고 받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모르는 두 분께 작지만 넘치게 받은 위로로 대상포진을 이겨내야겠다.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갑자기 만나게 되어 생겨버린 '내 편'에게 받은 위로를 다 써버리지 않고 조금은 남겨뒀다가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야겠다. 그러다 조만간 또 내게 따따한 위로 건네는 이를 만나겠지. 늘 그래왔듯이. 그러면 또다시 내 몫으로 조금 남기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줄 것이다. 마치 씨간장처럼 말이다. 간장이나 메주 장인 집에 가면 수백 개의 장독대에 간장이 가득하던데 내 작은 그릇으로 넘치는 위로를 다 담지 못해 내 밖이라도 옹기를 둘 수 있으면 좋겠다. 뭐, 물론 통장 잔고나 지갑이 넘치는 것도 좋겠지만-정말이지 너무나 좋겠고, 행복하겠고,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우선은 위로가 넘치는 사람이 먼저 되고 싶다. 뭐가 우선인지는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토요일 연재
이전 01화인생이 노잼일 땐 걸어나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