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에 내용을 많이 담을수록 오히려 덜 보인다는 사실.
어느 날, 화장품 브랜드의 패키지 리뉴얼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한껏 심플하고 정제된 디자인 시안을 제안하자, 클라이언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건 너무 허전하지 않아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제품인지, 뭔가 좀 더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한 접시 만 원짜리 뷔페에서, 접시 위에 음식을 산처럼 쌓아 올리던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고, 하나라도 더 맛보려는 마음. 하지만 그 욕심이 쌓이고 섞여 결국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채 뒤섞인, 보기에도 정돈되지 못한 접시. 어쩌면 많은 브랜드의 패키지도 그와 비슷한 모습일지 모른다.
화장품 패키지를 심플하게 가져가자고 할 때,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불안해한다.
그 불안은 곧장 이런 말로 드러난다.
"뭔가 더 고급스러워 보이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 제품은 미백에 주름 개선, 항산화, 탄력 케어까지 다 되는데, 이 내용을 다 담아야죠."
"어차피 인쇄는 같은 가격은데, 많은 내용이 들어가면 더 좋죠~ 이것도 넣고, 이것도 넣어줘요."
결국 디자인 안에는 기능성 문구가 줄줄이 들어가고, 미백 아이콘, 식약처 인증 마크 같은 요소들이 가득 차 오른다. 게다가 금박이나 펄, 글리터, 화려한 그라데이션 컬러가 추가되며 패키지는 점점 복잡해진다. 아니. 나는 이걸 '더러워지고 있다.' 라고 표현한다. 마치 “우리는 이런 것도 해요, 저런 것도 있어요!” 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런 패키지를 마주한 소비자는 무엇을 느낄까?
화장품 브랜드는 본질적으로 감성적인 소비를 유도한다. '좋은 성분'이나 '특허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쁘다’, ‘갖고 싶다’, ‘나를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정서적 동의가 동반되어야 구매가 일어난다. 그 때문에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패키지를 통해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 제품의 과학적 근거, 브랜드의 히스토리, 고객 리뷰의 압축된 문구까지. 그 모든 것을 담아내야만 소비자가 믿고 구매할 것이라는 일종의 강박이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쏟아내는 브랜드는 오히려 신뢰를 잃는다. 정보의 과잉은 오히려 브랜드의 본질을 흐린다. 복잡하게 꾸며진 패키지는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 아닐까?”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비자는 더는 단순히 많은 요소가 들어 있는 패키지에 감탄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비워냈는가’에 주목한다.
소비자는 ‘많은 정보’보다 ‘명확한 한 가지’를 기억한다.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제품을 스쳐 지나간다. 올리브영의 매대, 백화점의 진열대, 소셜 미디어 속 스폰서 광고까지. 그 가운데서 소비자의 뇌리에 남는 브랜드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한 브랜드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문장과 이미지, 요소들이 한 번에 던져지면 오히려 그 브랜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소비자는 혼란을 느끼고, 그 혼란은 곧 피로로 이어진다. 피로는 신뢰를 잃게 만들고, 신뢰를 잃은 브랜드는 팔리지 않는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말한다. 디자인은 정보를 담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덜어내는’ 일이라고. 브랜드가 진짜 자신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고르고, 나머지는 과감히 비워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패키지는 힘을 가진다.
심플한 패키지를 견디지 못하는 클라이언트들은, 때때로 이런 디자인을 “허술하다”거나 “싸보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잘 빠진 미니멀 디자인은 그 어떤 화려한 패키지보다도 구현하기 어렵다. 심플하게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제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 타겟, 시장 포지셔닝에 대한 깊은 고민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심플한 디자인은 그저 밋밋해 보이기 쉽다.
그래서일까. 심플함을 지향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과잉으로 흘러가는 브랜드가 많다. 그것은 용기의 부족이기도 하고, 전략의 부재이기도 하다. 브랜드의 자신감은 ‘덜어냄’에서 시작된다. 샤넬은 제품에 굳이 기능을 적지 않는다. 조말론은 화려한 문구 없이 향 이름만을 적는다. Aēsop은 타이포그래피와 절제된 컬러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 브랜드들이 이렇게 ‘말을 아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미 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
진짜 자신 있는 브랜드는 ‘이것만 봐도 충분히 설득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디자인에 군더더기를 넣지 않는다. 디자인이 감각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브랜드 철학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철학이 단단하면 군더더기를 뺄 수 있다. 철학이 약하면 결국 온갖 장식으로 자신을 포장해야만 한다. 다른 얘기지만, 브랜드가 유명해지고 나면 로고를 고딕 또는 심플한 세리프 서체로 읽히는 용도로만 리뉴얼 하는 경우도 비슷한 사례이다. 더이상 로고로 시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브랜드는 패키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많은 정보를 담아내려는 그 ‘채움’은 정말로 설득력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아니면, 브랜드의 불안과 걱정이 고스란히 표현된 것은 아닌가? 제품의 진정한 가치는 정보의 양에 있지 않다. 정확하게 전달되는 단 하나의 가치가 기억되고, 신뢰를 만든다. 그리고 그 가치는 대부분 ‘비워낸 후’ 드러난다. 우리는 여전히 접시 위에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한다. 조금이라도 더 쌓고, 조금이라도 더 보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말하려는 강박. 나중엔 짬뽕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우리 브랜드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었는지 조차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럼 어떻게 되냐고? 또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하겠지. 반면, 비워낸 접시는 정갈하다. 단 한 가지 요리만이 온전히 시선을 끌고, 맛을 기억하게 하고, 결국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많이 담을수록 덜 보인다. 덜 담을수록 깊이 남는다. 파인다이닝이 결국 가장 훌륭한 브랜드인 셈이다.
분식집과 파인다이닝에 피교한 [크몽 vs 디자인 에이전시]
심플함을 견딘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증거이며
브랜드로서 가장 자신 있는 태도다.
자신의 브랜드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를 잃는 행동을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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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는 모든 글은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며,
제가 쓰는 글에 대한 반대 의견은 당신의 말이 100% 맞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