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의 크리에이티브를 흡수한 거대 자본
브랜드의 탄생은 종종 거대한 전략 회의실에서의 계산과 시장 조사, 그리고 치밀한 마케팅 계획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사소하고, 더 인간적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작은 불씨가 거대한 숲을 태우는 불길로 번지듯, 개인의 창의적 실험이 회사 차원의 새로운 브랜드로 승화되기도 한다. 젠틀몬스터의 테이블웨어 브랜드 ‘누플랏(Nuplaat)’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아이아이컴바인드(젠틀몬스터의 모기업)가 이번에 선보인 누플랏은 단순한 신제품 론칭이 아니다. 이 브랜드는 과거 한 디자이너가 개인적으로 운영했던 테이블웨어 브랜드 ‘테이블미팅(Table meeting)’의 연장선에 있다. 놀라운 것은, 테이블미팅에서 제작했던 제품들이 이번 신규 론칭 과정에서 고스란히 누플랏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세상에 다시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회사가 직원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 아니라, 직원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정식 브랜드로 흡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 테이블미팅이라는 또 다른 브랜드가 물결무늬 포크나 열쇠 모양 포크 같은 독창적인 제품을 내놓은 적이 있다.
흔히 식탁 위의 포크는 규격화된 무채색 도구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그것을 해체하고 상징적 오브제로 바꿨다. 그 실험적인 시도는 당시에 일부 소비자들에게 ‘재미있는 발상’으로 주목받았고, 이내 여러 편집숍과 협업 제안을 끌어냈다.
이 지점을 좀 더 들여다보면, 단순히 ‘회사 브랜드’와 ‘개인 프로젝트’라는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보통 기업은 직원의 겸업, 경업을 제한한다. 회사 자원을 빼앗길까 우려하거나, 브랜드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만약 직원이 자신의 자본과 시간을 투입해 실제로 시장 반응을 입증한다면 어떨까? 회사 입장에서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아니라 ‘검증된 아이디어 뱅크’를 얻게 되는 셈이다.
젠틀몬스터의 사례를 보면, 이 가능성이 결코 추상적인 상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테이블미팅의 실험적 제품들이 실제 시장에서 입점 제안과 협업 러브콜을 받았다는 점은, 해당 아이디어가 단순한 공상이나 취미적 산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오히려 이미 검증된 시장성 있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훨씬 안전한 투자가 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해 막대한 리소스를 투입하기보다, 직원이 먼저 시장에서 ‘파일럿 테스트’를 한 셈이니 말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역전 현상이 있다. 흔히 회사가 직원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혁신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반대다. 직원의 창의성이 회사의 울타리를 넘어 독립적으로 자라났고, 그 성과를 회사가 역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마치 정원사가 맡은 구역에만 물을 주다가, 담장 너머에 스스로 자라난 꽃을 보고 새로운 정원으로 확장시키는 것과도 같다. 회사가 직원의 창의적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할 때, 그것을 억제하기보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오히려 양측 모두에게 더 큰 이득을 준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개인 프로젝트가 회사의 기존 사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내부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누플랏의 경우처럼, 개인의 실험이 회사의 새로운 영역 확장과 맞아떨어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회사는 이미 창의성과 시장성을 동시에 입증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고, 디자이너는 자신의 실험이 더 큰 무대에서 구현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는 단순히 개인과 조직 사이의 거래가 아니라, 창의적 자율성과 기업적 자원이 결합한 윈윈 구조라 할 수 있다.
젠틀몬스터라는 브랜드는 원래부터 안경을 넘어 공간, 예술, 오브제를 통해 독창적 세계관을 확장해온 회사다. 그들의 행보는 늘 기존의 정답을 의심하고, 다소 기이한 길을 선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누플랏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평범한 테이블웨어가 아니라, 실험적이고 상징적인 오브제로 식탁의 풍경을 재구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시도의 출발지가 ‘직원의 개인 브랜드’였다는 점은, 젠틀몬스터의 정체성과도 놀랍게 어울린다.
결국 이번 사건은 단순히 새로운 브랜드의 출시를 넘어, '조직과 개인의 창의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회사가 모든 창의성을 위에서 아래로 지휘할 수 없을 때, 직원이 아래에서 위로 제안하는 흐름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누플랏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흥미로운 대답이다.
앞으로도 기업들은 ‘겸업 금지’라는 전통적 규율과 ‘개인 창의성의 시장 검증’이라는 새로운 흐름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그러나 젠틀몬스터의 이번 시도는, 때로는 담장 안에서만 물을 주는 것보다 담장 밖에 자라난 꽃을 함께 가꾸는 것이 더 풍성한 정원을 만드는 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브랜드란, 창의성을 억제하는 제도가 아니라 창의성을 수용하는 태도 위에서 자라날 때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
제가 쓰는 모든 글은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며,
제가 쓰는 글에 대한 반대 의견은 당신의 말이 100% 맞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