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이 적은 행복
루시는 외출할 때마다 침대 위에 선인장 인형을 세워두곤 했다. 나는 그 인형이 귀여워 이름이 있냐고 물었는데 루시는 아직 없다며 추천을 부탁했다.
“음... 엠마뉘엘 마크롱은 어때요?”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프랑스 대통령 이름을 말했더니, 루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배가 터질 듯 크게 웃었다. 그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카밀에게 건넸다.
“혹시 괜찮다면 당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여기에 적어주실 수 있나요?”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카밀은 손에 공책을 든 채 10분이 넘게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 없이 글을 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꿈을 품은 눈빛. 본인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 순간을 영상으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카밀이 적어준 행복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삶이 주는 작은 것들. 아침의 커피 한 잔, 햇살 한 줄기, 비 냄새, 사람들의 미소처럼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올 때 마음속에 작은 감각이 일어나고 그 감각이 자신을 현재에 머물게 해 준다고 했다. 두 번째는 호기심과 발견이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만남, 새로운 환경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엇을 발견할 때마다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여행이 행복에 있어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눔이라고 했다. 나눔은 곧 교류이고, 그 교류가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 글을 읽은 순간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왔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행복이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카밀이 말한 것처럼 일상 속에 숨어있는 작은 순간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카밀이 써준 행복을 읽었을 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호기심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은 늙지 않는다는 대목에도 공감이 갔다. 내가 혼자 37일 동안 유럽 여행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돈 벌어서 왜 노는 데 쓰냐, 당장 취소하라”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린 나이에 떠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정말 여행은 사치일까?
문득 3년 전, 친구와 일본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지브리 미술관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구글맵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했는데, 그 순간 화면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나라들이 펼쳐져 있었다. 20년 동안 내가 가본 나라가 고작 필리핀과 일본 뿐이라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하나의 울타리 안에만 갇힌 채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부터 더 늦기 전에 이 세상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쉬는 날이면 밤낮없이 투잡을 뛰며 직접 도시락을 챙겨 다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했고, 매달 6만 원이 나가는 통신비가 아까워 가장 저렴한 알뜰폰 요금제로 바꾸기도 했다.
틈만 나면 여행을 준비했고,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4개월 동안 550만 원을 모아 세상을 보러 갔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홀로 배낭 하나만 들고 20개국을 돌던 여행자, 퇴사 후 귀국 티켓 없이 기약 없는 여행을 즐기던 사람, 프랑스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여행을 하던 누나, 먼 타지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학원을 운영 중이던 사장님까지… 여행은 수많은 인연을 만나게 해 주었다.
돌이켜보면, 단지 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하나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스스로 번 돈으로 처음 밟아본 낯선 땅은 나에게 큰 희열을 주었고, 삶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무수한 길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결국 여행이 아니라도 행복을 위해서는 호기심이 필요하다. 다만 나에게는 그 호기심이 여행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유난히 큰 울림을 주었다. 보통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무엇을 할 때 행복하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 “처럼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답하곤 한다. 하지만 카밀은 행복을 결과나 상태로 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돌아보면 여행의 기억을 따뜻하게 만든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순간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어리고 혼자 여행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택시비와 밥값을 대신 내주곤 했다. 미안한 마음에 현금을 꺼내 드리려고 하면 ”괜찮다며, 다음에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그때 도와달라 “고 하셨다.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아 언젠가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