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새벽5시

그때는 하지 못한것들

by 윤설

새벽 5시

블라인드를 올렸다


아파트 가로등 불빛들이 하나씩 꺼지고

집들의 불들이 하나씩 켜진다

나는 커피를 내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동이 터오는 풍경을 기다렸다

나는 이 새벽의 고요를 오래전부터 원했다


32층에서 맞이하는 이 새벽은

조금 더 살고 싶단 생각마저 들게 한다

오늘 새벽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다


이 원두콩 한 봉지

이 커피잔 하나

동이 터오는 새벽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새벽은 늘 있었고

그때도 만원은 있었다

굳이 커피잔이 아니라 종이컵이라도 마실 수 있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눈에 띄게 잘 사는 것도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빚도 있고 몸은 더 부실해졌다

그런데 그때는 하지 못했고 지금은 한다


왜였을까


작은 단칸방 가난의 냄새가 배겨있던 그 풍경들은 내게

새벽녁 커피 한잔도 허락하지 못했다

내게 아침은 언제나

칼날 위에 발을 딛고 서야 할 시간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동이 터오는 하늘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상상은

현실과 더 대비되어 그런 상상조차

나를 고통스럽게 했고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다


동이 터오는 창밖을 보며

커피 한잔 그게 뭐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현실이 나를 눌렀고 내가 나를 더 심하게 눌렀다


혹시 핑계였을까

혹시 나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건 아닐까


지금의 내가 이젠 경복궁을 떠올리며 커피를 마시는 나처럼

그때도 동이 터오는 아침 지금 모습의 나를 상상하며

또 다른 커피 한잔을 가슴에 넣어두고 살았더라면


내 삶은 조금은 앞당겨졌을까

조금은 덜 숨 막히고 조금은 덜 힘이 들었을까


그 시간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버티느라 살아내느라 나를 뒤로 미뤄뒀던 시간

가난해서가 아니라

감히 생각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시간


그리고 그 시간들을 지나온 내 모습이

대견하고 또 애달팠다


지금은 이 커피를 마시며

경복궁에서 맞이하는 새벽을 상상한다

결과는 중요치 않다


현실감 제로일 수도 있는 이 기분 좋은 상상

슬프지 않다


상상해도 된다고 나에게 허락했다는 것이

오늘은 크게 느껴졌다


해가 완전히 떴다

새벽은 가고 아침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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