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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o May 25. 2022

세 번의 외침은 아마.. 마음이 보낸 신호였을지도

[ 1월의 퇴사 일기 ]


영화 의상 일을 했다. 했다.. 했다는 종결.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했고 군기가 심했던 학교라 절대 패션 회사에 취업을 하지 않을 거란 다짐과 함께 졸업했다. 처음으로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달리 말하면 백수가 됐다. 그 덕분에 영화를 볼 시간이 많아졌다. 배운 게 도둑질이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옷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옷이란 게 캐릭터를 설명해주기도 하는구나 신기했다. 나도 저런 이야기가 담긴 옷을 만들고 싶어졌다.


결국엔

의상과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으로 간 현장은 사극이었다. 새 옷을 일부러 사포로 갈아내고, 색 작업으로 세월을 입히는 모든 작업들이 새로웠고 재밌었다. 또래 언니, 오빠들과 지방 촬영을 갈 때면 소풍을 가는 것 같았다. 휴게소 호두과자를 좋아해서 지방 촬영의 즐거움은 더 컸다.


이름 있는 의상팀이라 자부심도 컸고, 그만큼 다양한 작업들을 할 수 있었다. 사극, 좀비물, 현대물, 시대물, 액션, 로맨스, 추리  여러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딘 테마파크에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이 고된 탓인지 2년도 안돼서 몸이 크게 아팠고,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 잘하고 있는 걸까?’, ‘ 일을 오래   있을까?’, ‘나의 목표는 무엇이지?’ 많은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면서 점점 위축되어갔다.





영화 의상 일이 크게는 사무실 업무(디자인, 제작)와 현장 워드로브로 나뉘는데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곳에 쓰이는 직원이었다. 하나에 진득이 몰입할 수 없었다. 처음엔 '둘 다 할 줄 아니까 그런 거겠지!' 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엔 '여기든 저기든 빠져도 무관한 사람인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업성과나 피드백이 없는 곳이라 나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윗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알 도리가 없었다. 기대 이상으로 해낸 것들은 급급히 지하 수면으로 가라앉게 추를 달았고, 실수는 파도를 타고 왕의 상에까지 오르게 했다. <잘못 궤적 포트폴리오>를 받치옵니다.


잘못을 했으면 곤장을 맞고, 잘했으면 당근을 받아 명확하게 오가는 것이 있었으면 덜 불안했을 텐데. '애매함'이란 꺼림칙하고 불편한 감정이 날 계속 괴롭혔다.



차를 가득 채우던 빨래



내게 촬영 현장은 성향 자체가 맞지 않는 곳이었다. 꼼꼼함과 섬세함보다는 대충대충, 빨리빨리를 외쳤고 상당히 거칠었다.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은 미술, 분장, 의상팀들이 (그들 눈에) 사소한 것들을 수정하기 위해 시간을 끌면 "예술하러 왔냐"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었다. 창조와 예술을 하는 집단치곤 상하관계도 굉장히 뚜렷했고 보수적이었다.


현장-빨래-잠으로 반복되는 생활을   하다 보면 바보가 되어가는  같았다.    읽을 시간도 없었고 사유는 사치였다. 시간이 있다면 자야 했다. 화장실에  때마다 두루마리 휴지를 보고 먹먹했다. 너도 용케 걸려 있구나.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쓰는 사람 입맛대로 끊어지는. 그러다 쓰임을 다 하면, 다른 걸로 쉽게 채워질 - 우린 그런 운명이구나.


어떤 현장에선 "두루마리1(의상팀)", 두루마리2(야), 두루마리3(너)"이 나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 현장에선 스텝들이 다 듣는 공용 무전기로 상욕을 듣기도 했다. "ㅅㅂ 연결 맞추지 말고 그냥 꺼지라고" 바늘이 꽂힌 채로 꺼질까요? 손이 벌벌 떨려 실을 매듭짓지 못했다. 가위로 실을 자르고 바늘만 뽑아 나왔다.


이런 저런 일로 기술팀 하나가 짐을 싸들고 떠났고. 계획했던 분량의 반의 반도 찍지 못하자 화가 난 고래들이 화풀이할 새우를 찾아다니던 날이었다.  그 새우가 내가 될 줄은 몰랐다. 새우 알레르기가 있는 내가 새우가 된 날, 나는 그 현장을 박차고 나왔다.


다른 현장에선 오리궁둥이라고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온 마음을 다해 '널 평생 증오할 거야' 째려보는 것 뿐이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깊은숨으로 애써 감췄다. 그들 앞에서 우는 꼴을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숨죽여 우는 날이 잦았다. 룸메이트가 볼까 봐서 샤워를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우는 것도 흠이 될 거라 생각한 바보 같은 나날이었다.





이렇게 계속 흔들리고 상처받음에도,  일을 계속했던  좋은 동료들 때문이었을까. 허울 좋은 명예에 대한 욕심이었을까. 정말  일이 재밌고, 좋아서였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중심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겠지


 년간 퇴사 의사를  번이나 밝혔고 매번 새로운 조건들을 제시받으며 돌아왔다. 프로퇴사러이자 프로 입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앞서 박차고 나왔던 현장으로 정말 끝을 내려고 했지만. <주 4일, 사무실 출근>이란 꿀 같은 조건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얻어낸 워라벨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2021 오랜 시간을 참여했던 작품 크레딧에  이름이 없었다. 많은 이들의 이름이 없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의  개월이 쉽게 지워질  있구나.’ 섬뜻했다


칸이 뜯겨나갈 때마다 슬퍼하던 두루마리 휴지는 <잘못 궤적> 조차 남길 수 없는 너무 가벼운 존재란 걸 그제야 알았다. 휴지 코너의 대미는 각휴지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작품이 세계적으로 흥행할수록 대화에 자주 언급됐다.  멋쩍게 웃거나 자리를 피했다.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자리 잡았기에. “  이름은 빠졌나요?”라고 물어보지 못하는 내가 정말 정말 싫었.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나는 과거의 일기장에서 옅어져  뿐이었다.





다 때려치고 싶단 마음이 불쑥  제주에 있게 했다. 에라 모르겠다 떠나온 독서 여행이었다. 작은 가방 하나에 책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만 들고 떠나왔다.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작가님의 삶이 엄청난 사랑으로 채워져 있어서 서러웠다. 나의 찬란한 청춘은 왜 이리도 보잘것없을까 억울했다. 이렇게 흘러가게 두긴 아까웠다. 흩어진 나를 다시 찾아야 했다. 늦진 않았겠지 눈물이 계속 흘렀다.


누군가를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 퇴근할지 모르는 삶이 아닌 내가 하루를 그려나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일상이 되어도 괜찮은 일을 찾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이제는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실장님, 저 퇴사하려구요.”

“왜?”

“제 스스로 흔적 남기며 살고 싶어요.”


2022년 1월 8일, 다소 낭만적인 퇴사를 했다.



메리 올리버, <천 개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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