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강요하는 생의 육욕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았습니다.
인간이 최고로 잔혹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생존이 위협 받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결핍 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 질 수 있는지를 인류문화학적으로 다룬 영화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론 결핍의 문제는 인간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도록 강요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초반부에 논에 갓난아이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성서에 등장하는 출애굽기와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영아 살해가 오버랩 되기도 하더군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세력이 위협을 받을 위기에 처할 때 어느 한 집단이 행하는 폭력, 살인, 강간과 같은 행위가 허용될 수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규범'이 되어 합당한 일처럼 여겨지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공포를 자아내기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다윈의 이론인 <자연선택>에 의해 발생되는 우생학적인 형태는 실상 원초적으로 인간 삶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사유하게 되지요. 자본주의를 태생으로 파생 된 '신 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의 사회속에 투쟁하는 현대인을 돌아볼 수 있는 영화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가지 하자면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정을 받았을 때 너무 동양적이라 수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독은 여주인공을 비롯한 대표만 영화제에 가도록 하고, 자신은 도쿄에서 마작을 치고 있었는데 덜컥 상을 타버린 거죠. 그러니까 결국 영화가 담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는 보편적,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주로 하층민의 삶, 억압 받는 여성, 재일교포등 사회에서 분투하는 이들을 등장인물로 설정하여 영화를 찍었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학생운동을 통해 '해방'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것인 연출과 화법이 특징이며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수위가 높습니다.
영화는 오직 한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이 마을은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척박한 환경 때문에 궁핍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규칙이 남의 식량을 도둑질 한 가정에게는 크기에 따라서 벌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으며, 식구의 입을 줄이기 위해 첫째 아들만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몰래 버리는 일도 성행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에도시대때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식구수에 따라 부여했던 인두세가 과도하게 징수되면서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목을 졸라 죽이는 일들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한 해에 5-7만명이 되는 아이가 죽음을 당했다고 하죠. 이처럼 또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다른 식구가 생기는 것은 가정에게 사실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영화의 공기를 시종일관 텁텁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을 합니다. 또한 일본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명감독 답게 자연(뱀, 부엉이, 쥐, 옷에 새겨진 자연)과 인간을 교차적으로 연출하는 기지가 돋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큐브릭처럼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촬영장에서 상당히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년 6개월동안의 제작과정으로 스태프들이 도망갔다던 전설의 영화가 존재하기도 합니다(신들의 깊은 욕망) 그리고 아들들은 부모가 70세가 되면 그들을 엎고 나라야마라는 산에 올라가서 부모를 버려야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타츠헤이는 괴로워하면서도 전통에 따라 자신의 어머니인 오린을 산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일상으로 돌아간 가정을 비추며 영화가 막을 내립니다.
영화는 결핍과 규칙이란 키워드로 압축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은 너무나 잔혹해서 영화적인 상상력이라 믿고 싶지만, 실상 역사에서는 더 지독한 상황들이 많아 입에 담을수 없을정도입니다. 영화에서는 식량 문제, 즉 식(食)의 결핍으로 인해 아이를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을에 여자가 소수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성욕을 받아주는 것이 일종의 '덕'을 쌓기 위한 행위로 여겨진다던가 식량을 훔친 일가족을 결국에 몰살시켜 식량을 나눠 가지는 일등등은 결핍의 문제가 인간을 어떻게 행위하는지를 인류학적으로 관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결핍의 문제로 정해진 규칙은 관계로부터 촉발되는 '정' 혹은 '사랑'이란 개념보다 더 큰 의미로 점철되어 인간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윤리와 도덕이란 구분의 경계를 쉽게 합리화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산에서 가부좌로 앉아 손을 모으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오린의 표정에서 애처로움과 동시에 인간의 광기가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눈물을 흘리며 아들 타츠헤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쏟아지는 눈길을 밟고 처연하게 내려갑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노래하죠.
"아무리 날씨가 춥다 하여도 산에 가는 날에는 솜옷을 입을수가 없다네 나라야마에 가는 길에 아무리 고되다 하여도 눈이 펑펑 내리면 복을 받을 거라네. "
그렇게 인간은 모두가 나라야마로 향하는 길에 서서 부조리함을 경험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복'이 존재한다고 믿는 미신적 삶을 규칙이라 규정하고 사유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