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보이는 것만이 전부입니까?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비록 사정은 달랐지만 안타깝게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이 가인은 재림에게서 이성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 제게 이렇게까지 깊은 얘기를 들려주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가인이 물었다. 재림에게는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었다.



“대표님 아니, 이가인 씨가 진심이라서요. 공 선생한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제가 들을 자격이 있나요?”

“네. 공 선생은 애써 과거를 숨기지도 그렇다고 들추지도 않아요. 그저 자신이 걸어온 인생 가운데 하나이고 그 길에 멈춰 있지도 않은 친구거든요.”

“……그렇군요.”



가인은 공재림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누가 들어도 엄청난 비극이자 아픔이었다. 지극히 밝아 보이는 그와는 사뭇 대조적인……. 가인은 그런 과거를 딛고 일어난 재림이 이 순간 무척 그리웠다.



“실례지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넌지시 가인의 눈치를 살피던 기준이 말을 건넸다.



“네. 그러세요.”



기준이 카페 밖으로 나가자 혼자 남겨진 가인이 지그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런 걸 질척거린다고 하는 건가?”



쓸쓸한 미소 속, 가인이 중얼거렸다. 아직 데면데면한 치과원장에게 너무 솔직했나 싶은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후회가 되는 건 아니었다.


뒷조사에 능한 수현에게서 잘 정리된 보고를 듣는 것보다 이렇게 공재림을 알아가는 재미가 열 배, 아니 백배는 더 흥미롭고 신선하니까.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잠시 자리를 비운 기준의 폰이었다. 가인의 시선이 자연스레 폰으로 향했다. 문자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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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실패했습니다.]


‘보스?’


화면 위로 뜬 메시지에 가인이 어리둥절하던 찰나였다.



“오래 비워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온 기준이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냉큼 핸드폰을 재킷주머니에 넣었다.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원장님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네요.”

“공 선생에 관한 거라면 괜찮습니다. 제게는 막냇동생 같은 친구라서요.”



호탕한 기준의 웃음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인이 당차게 마음먹은 결심을 전했다.



“다음 주 금요일 오후 2시. 재단 대표가 아닌 이가인으로 이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공 선생님께 전해주셨으면 해요.”

“번호 알려드릴까요? 직접 말씀하시는 게 낫지 싶은데.”

“아니요. 원장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공 선생님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만약 나오지 않으시면 저도 거기서 마무리하려고요.”

“아. 그럼 안 되는데…….”



바라는 결말이 아닌 듯 기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보아 하니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딱 1시간만 기다리고 저도 마음 정리하겠습니다.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나오실 분 아니니까요.”

“대표님도 그새 다 파악하셨네요. 허허.”



잠시 후, 가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기준이 카페를 나와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갔다.


가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주는 김기준 원장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원장 덕에 가인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합정동을 떠날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유익했던 시간이야.’


그렇게 지난 금요일 원장과의 만남을 떠올린 가인이 수현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하영원 남자친구 안도영, 도강물산 해외파트팀 근무.”

“총괄실장님 남자친구요?”

“응. 안도영에 대해 알아봐. 가족 중에 혹시 여동생이나 결혼한 친인척이 있으면 사진도 첨부해 주고.”

“알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과 함께 수현이 밖으로 나가자 책상 위에 팔을 올린 가인이 턱을 괴었다.



“영원이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안도영, 내 친구의 선택을 후회하게 하지 마.”



***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 지경하 살인사건에 대한 후속기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1차 부검결과와 맞물려 당시 그녀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던 관련자들의 조사까지 모두 마친 이후였다.


부검결과, 지경하는 치사량에 상응하는 니코틴 중독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추정 시간은 토요일 새벽 5시~7시 사이로 매니저가 그녀를 발견하기 전 지 씨는 이미 숨져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부검당시 지 씨 위장에는 약간의 치즈 조각들과 함께 와인이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빵빵하게 복부가 부풀어있던 이유 또한 무려 스무 병에 달하는 와인을 단시간 내 무리하게 흡입한 결과라고 국과수는 전하고 있었다. 지 씨 얼굴에 말라붙은 액체의 정체도 밝혀졌다. 다름 아닌 지 씨의 소변이었다. 이를 두고 경찰은 피해자를 조롱한 범인의 만행으로 보고 있었다.


지 씨 몸에서 이렇다 할 주삿바늘 자국이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부검의는 그녀가 마신 와인 속에 니코틴 원액이 섞여있었다고 밝히는 한편, 쓰레기통 옆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에서도 지 씨의 DNA가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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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결과 비교적 이른 나이에 흡연을 시작한 지 씨는 주로 매니저나 가족 등 가까운 지인들이 있을 때만 담배를 피웠다고 했다.


거기다 평소 와인을 즐겨 마셨던 그녀는 항시 50여 병에 달하는 와인을 자택에 구비해 놓았으며 사건 당일, 다른 주류와는 별개로 지인들과 3~4병의 와인을 나눠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부검결과와 함께 수사가 가속화되며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처음 지 씨의 생일파티에는 십여 명 안팎의 지인들만이 동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조사결과, 지 씨 자택에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cctv를 의식한 지경하가 가림막을 이용해 카메라를 가려놓았던 탓에 경찰은 정확한 인원 및 신분확인은 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편 파티에 참석했던 지인들에 따르면 지 씨는 발견당시 입고 있었던 반바지에 민소매 티가 아닌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마지막까지 지 씨와 함께 있었던 배우 장영주는 경찰조사에서 지 씨가 취하긴 했지만 스스로 몸을 가눌 정도였으며 곧 시작될 드라마 촬영에 잔뜩 들떠있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파티 동석자들을 추적하는 한편, 지경하와 원한관계 또는 금전 등의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늦은 저녁, 소파에 앉은 가인이 tv뉴스를 통해 지경하 살인사건 후속보도를 시청하고 있던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왔니? 여기 앉아. 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수현을 향해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킨 가인이 일어섰다.



“아니요. 안도영 보고 건으로 잠시 들렸습니다.”



마치 가인을 닮은 듯 감정의 씨앗을 짓밟아버린 무표정한 얼굴로 수현이 소파에 앉았다.



“볼이 빨갛게 얼었네. 따뜻한 차 한 잔 줄 게. 잠깐 뉴스 보고 있어.”



가인이 주방으로 향하자 명령을 수행하는 양 수현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뉴스 채널에서는 여전히 지경하 살인사건에 대한 후속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수현이 큰 동요 없이 차분히 화면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상큼한 유자향이 퍼지는 찻잔과 함께 수현 앞에 유자차가 놓였다.



“뉴스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나. 불과 몇 주 전 함께 사진까지 찍었던 스타인데…….”



소파에 앉은 가인이 tv 화면에 뜬 지경하 사진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죽기 전 좋아하는 건 다 누리고 갔잖아요.”



다소 냉소적인 수현의 반응에 가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알아? 지경하가 좋아하는 걸 누렸는지.”

“지난번 대표님께서 지경하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셨을 때 단순히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통합 보고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와인과 담배 그리고 파티를 매우 즐긴다고 들었습니다.”



흥신소를 능가하는 수현의 정보력에 가인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수현을 택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함께.



“듣고 보니 그러네. 짧았지만 그래도 나름 화려한 삶이었어. 지경하 말이야. 그치?”

“너무 어린 나이에 꿈을 이뤘지만 그 대가로 생각하는 법과 본질을 잃어버렸죠.”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수현의 보기 드문 평가였다. 자신과 동갑내기였던 한 연예인의 일생을 통찰한 듯 단호한 어조가 가인에게 사뭇 신선한 시각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어린 나이에 조직생활에 물들게 되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거치기도 전, 어른들이 알아서 결정해 주니까요.”

“지경하가 그랬다는 의미야?”

“같은 시스템 내에서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지경하는 그런 케이스로 성장했다 보니 생각하는 법을 상실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불쌍한 거죠.”



이미지 회복을 위해 보육원 아이들을 이용했던 지경하에 수현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런 가운데 부모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성장한 아이의 입에서 화려한 삶을 살다 간 스타를 불쌍히 여긴다는 건 누군가를 응징하는 그녀만의 방식인 듯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생각이 깊구나. 통찰력도 높고.”

“네?”

“수현이 너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수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수현은 항상 그렇게 잘라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화두로 삼는 것을 불편해했다.


뉴스가 끝나자 가인이 tv를 껐다.



“지경하 사건 말이야, 어떻게 될 것 같아?”



의견을 묻는 가인에 수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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