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월요일.
일찌감치 출근한 가인을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은 강남경찰서 차경묵 경사와 그 후배였다.
비서 수현의 안내로 두 형사가 대표실에 들어서자 책상에서 일어난 가인이 그들을 소파로 안내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강남경찰서 형사과 강력 1팀 차경묵 경사입니다.”
인사와 동시에 경사가 가인에게 명함을 건넸다.
“…….”
“혹시, 지난 토요일에 벌어진 배우 지경하 씨 살인사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밤늦게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가인이 짧게 대답했다. 주말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건이었다.
토요일 저녁 처음 속보기사가 뜬 후 엽기적으로 살해당한 한 연예인에 주말 내내 온라인 세상은 그야말로 뜨거웠으니까.
이미 해외까지 사건이 보도될 만큼 지경하라는 인물과 잔인한 살해현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지경하 씨 행적을 추적하다 몇몇 복지재단 행사에 참여한 흔적이 있어서요. 그중 한 곳이 여기 노아복지재단이라 확인 차 들렸습니다.”
“맞습니다. 한 3주 전쯤 지경하 씨가 저희와 함께 보육원 봉사를 하셨어요.”
“그럼 그때 지경하 씨에게 명함을 주신 건가요? 참고로 당시 파티에 동석했던 지인들 가운데 대표님 명함을 갖고 계셨던 분은 없었습니다.”
명함 이야기가 나오자 가인이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조금 전 수현으로부터 경찰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가인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닥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요일 이후 일체 온라인 접속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기사에 밀집한 익명의 누리꾼들이 앞다퉈 나름의 추리소설을 써 내려가며 지경하 살인사건에 가인을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살해당하기 직전 지경하가 쥐고 있던 명함의 비밀’이란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올린 기자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별 다를 게 없는 내용이었다. 그저 지경하 살인사건에 가인의 비극적이고도 슬픈 가족사를 덧붙여 읊어댔을 뿐.
일부 악플러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이미 가인을 범인으로 단정하는 댓글을 도배하는 중이었다. 지경하와 가인이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가인의 애인을 지경하가 빼앗는 바람에 죽였다는 루머까지 형성하며.
사건 발생 후 불과 하루 만에 양산된 풍문이었다.
“네. 지경하 씨가 명함을 원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 직접 제게 전화를 걸어 본인 생일파티에 초대하기도 했었습니다.”
가인이 먼저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 경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금요일 저녁 생일파티에 참석하셨습니까?”
“아니요. 전 지경하 씨와 개인적 친분도 없거니와 그날은 제 부모님 기일이라 오후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수목장에 다녀왔습니다. 저녁 8시쯤 올라와서는 내내 집에 있었고요.”
“아, 그러시군요. 한데…….”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차 경사가 곧장 질의를 이었다.
“지경하 씨는 왜 친분도 없는 대표님을 초대했을까요?”
“그날 잠깐만 들러서 사진만 찍고 가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sns에 올리고 싶다고요. 그런데 제가 거절과 동시에 전화를 끊어서 다른 이유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강력범죄를 담당하는 베테랑 형사답게 차 경사는 가인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을 풀지 않았다.
“원하시면 주유소 영수증 제출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확인됐습니다.”
꽤 구체적인 구두 진술에 만족한 듯 일어나려던 차 경사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대표님과 친분도 없고 생일초대도 거절당했는데 지경하 씨는 왜 죽기 전, 대표님 명함을 손에 쥐고 있었을까요?”
혼잣말인지 질의인지 모를 애매한 말투에 가인이 당당히 형사를 응시했다.
대략 40대쯤 돼 보이는, 면도가 필요한 덥수룩한 수염에 까칠한 얼굴이 한 눈에도 임무에 충실한 열혈 형사였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그 옆에 앉아있는 까마득한 후배와는 다르게.
경사의 마지막 질의는 가인 또한 용의 선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하는 경찰 입장에서 어쩌면 당연한 시각이었다.
금요일 오전, 지경하는 자신의 폰으로 가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설령 가인에게 다시 전화를 하려 했다 해도 사건 당시 긴박했던 지경하에게 명함은 불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많은 소품 가운데 그녀는 가인의 명함을 손에 쥐었을까……?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손에 처참히 살해된 지경하가 쥐고 있던 명함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이유였다.
“앞뒤 상황을 전혀 모르니 제가 알 턱이 없죠. 저도 기사 보고 이해가 안 돼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극한상황에서 손에 잡히는 무기가 그것 말고는 없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대답을 피하지 않은 가인 또한 고뇌한 흔적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온갖 억측과 악플에 시달리는 가인이었기에 그녀의 노력이 측은했는지 차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명함도 상해를 가할 수 있는 충분한 무기가 되죠. 미처 그 생각을 못했네요.”
차 경사가 후배와 함께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시간 내주시고 성실히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또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하루빨리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네요.”
두 형사가 사무실을 나가자 책상에 앉은 가인이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후우…….”
조금 전 형사들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가인은 숨이 막혀왔다.
그녀 나이 불과 6살이던 28년 전,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집에 들이닥친 경찰이 괴물로 보였던 그때의 악몽이 불쑥 튀어나온 탓이었다.
“트라우마가 이렇게 무섭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똑똑! 마침 대표실에 들어선 수현이 가인 앞에 물 잔을 내려놓았다.
“따듯한 물입니다. 좀 가라앉으실 거예요.”
“고마워. 오전 스케줄은 모두 취소할 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인터넷은 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지나친 악플은 따로 자료 부탁해.”
“네.”
익숙한 듯 짧게 대답한 수현이 나가자 가인이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전면 창으로 내리쬐는 가을햇살이 등지고 앉은 그녀의 사무실을 밝히는 중이었다. 분명 하늘은 청명했고 샛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을 날리는 산들산들한 바람이 외출하기 좋은 가을이었다.
그럼에도 가인은 그것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또다시 표적이 된 자신의 과거사에 그녀는 벌써부터 심신이 지쳐왔다.
발버둥 쳐봐야 부질없는 절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매번 따라다니는 어두운 꼬리표들이 그녀의 양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죽어야 비로소 끝날 것처럼.
그러나 가인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소용돌이에 휘둘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기사를 접한 공재림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저 그것이 두려웠을 뿐.
불현듯 그녀의 기억이 지난 금요일로 옮겨갔다.
지난 금요일 정오.
합정동 한 카페 안으로 가인이 들어섰다. 새빛치과 원장 김기준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본래는 유명 한정식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진료가 늦어진 탓에 원장은 약속을 미루고자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이미 근처에 와있던 가인은 상의 끝에 카페에서 감사를 전하기로 했다. 명분은 의료봉사에 대한 감사인사였다. 숨은 의도야 공재림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서였지만.
카페는 꽤 규모가 있는 전면 창이 통유리로 된 구조였다. 정오 무렵이라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통유리 옆 빈자리에 앉은 가인이 원장을 기다리며 차분히 바깥을 응시했다. 금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활기차 보였다.
‘다들 인생이 살아갈 만하나 보네.’
그렇게 별 감흥 없이 가인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안도영?”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에 가인이 대뜸 한 사람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안도영이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 짙은 눈썹에 쌍꺼풀 진 큰 눈, 시원한 올백 머리에 눈가 옆 흉터까지…….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지만 가인은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난번 안도영이 입고 나왔던 흰색 숏 패딩에 흰 운동화를 그는 오늘도 장착하고 있었다.
가인은 반가운 마음에 앞서 점점 가까워지는 안도영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옆으로 나란히 걸어오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게다가 안도영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카페 안 가인을 보지 못한 듯했다. 가인의 시선이 곧 여자에게 향했다.
여자는 어깨를 덮는 웨이브 진 긴 머리에 20대쯤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한 손에는 기저귀 가방이 들려있었고 다른 손은 빈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예상컨대 안도영이 안고 있는 아기의 엄마인 듯했다. 가인의 시선이 아기를 향했다.
대략 2살, 많아야 3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모자를 내려 씌운 탓에 얼굴은 잘 볼 수 없었지만 안도영 품이 익숙한 듯 아기는 꽤 평온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시간에 우연히 목격된 현장이 가인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안도영은 자신을 향한 가인의 시선을 알아보지 못했고 의문의 여자와 카페를 지나쳤다. 마치 다정한 부부처럼.
수많은 상상이 가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만약 그가 영원을 속인 거라면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나마 영원이 아닌 자신이 현장을 목격한 걸 다행이라 여기며.
“가족 관계부터 알아봐야겠네. 여동생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생각을 정리한 가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찰나였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그사이 카페에 도착한 기준이 가인을 알아보고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