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사람……이잖아?’
가인의 집 담벼락 끝 작은 쪽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수현에게 포착됐다.
쪽문은 성인남자기준 상체를 잔뜩 웅크려야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나무문으로 재작년 가인이 비밀리에 주문 제작한 정원 뒤쪽과 연결된 문이었다.
목적은 단순했다. 집 밖을 자주 들락거리는 고양이 뮤를 위한 통로.
다만 외진 정원 뒤쪽인 데다 반려묘를 위해 경비구역에 포함시키지 않은 사각지대라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마저도 고양이가 죽은 이후에는 달랑 자물쇠만 채워 놓았으니.
그런데 외부인이 절대 알 리 없는 저 쪽문을 열기 위해 누군가 애쓰는 모양새가 수현에게 딱 들킨 거였다.
“당신, 누구야?!”
수현이 소리치자 분주히 움직이던 두 팔이 멈췄다. 그리고는 서서히 일어나 뒤를 돌았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검은 가죽재킷을 걸친 마른 체격에 수현과 엇비슷한 신장을 가진 정체 모를 남자였다.
푹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 얼굴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나이마저 가늠이 어려웠다.
수현이 곧장 경계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 서있는 괴한은 오래전부터 이가인의 집을 탐색한 도둑 내지는 강도, 또는 재산을 노린 청부업자임이 틀림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자백하는 게 좋을 거야, 너, 누구야?!”
자비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을 것 같은 저음의 냉랭한 그녀의 음성이 적막가운데 낮게 울렸다.
물어오는 수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내 시야에 걸린 이상, 넌 그대로 못 가.”
수현이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흉기를 소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에 순발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순간, 마스크 너머 갑자기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비웃음이었다.
“멍청한 년.”
마스크에 가려진 남자의 음성을 수현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
분명 수현이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비웃음 뒤로 수현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멍청한 년이라는.
그때였다.
탁! 남자가 재킷 안에서 꺼낸 연막탄을 던지자 금세 희뿌연 연기가 퍼지며 높이 솟아올랐다.
“모, 뭐야?!”
눈앞이 뿌연 연기로 뒤덮이자 한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수현이 다른 손으로 연기를 헤쳤다. 그러나 자욱했던 연기가 사라질 때쯤 남자 또한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수현이 급히 폰을 꺼냈다. 이가인에게 보고가 시급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남자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멍청한 년…….”
잠시 후, 재킷 주머니에 폰을 넣은 수현은 그대로 동네를 빠져나갔다.
**
거실로 들어선 가인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뉴스가 시작되자 차분했던 두 눈이 점점 또렷해지며 볼륨을 높인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영원이 다급했던 이유를 알아냈다.
가수 겸 배우 지경하가 어젯밤 살해됐다는 속보 때문이었다.
신고자는 그녀의 매니저 김경수였다. 변경된 스케줄을 전달하려 했으나 종일 전화를 받지 않은 탓에 저녁 무렵 집으로 찾아온 매니저가 거실에 쓰러져있는 지경하를 발견했다고 했다.
보도는 꽤 구체적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강남구 청담동 80평 빌라에 혼자 거주하고 있던 지경하는 지난 금요일 저녁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 생일파티를 열었다고 했다.
가수, 배우, 사업가, 모델, 디자이너 등 약 10인 이상이 지 씨 집으로 모였고 다음 날 새벽 4~5시 사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매니저 김경수가 처음 지경하에게 연락한 건 토요일 낮 1시경이었다고 했다. 전날 밤샘 파티로 지 씨가 자고 있을 거라는 추측에서였다. 그런데 오후 6시가 넘도록 전화를 받지 않자 매니저가 직접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매니저 김경수는 여러 번의 호출에도 반응이 없는 지경하에 빌라 관리자를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고 곧장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은 놀라운 현장과 마주했다고 했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지 씨 집 거실에는 널브러진 다수의 술병과 술잔, 먹다 남은 음식들, 흩어진 오색 풍선들과 폭죽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 지경하는 거실 벽면에 부착된 알파벳풍선 ‘HAPPY BIRTHDAY’ 문구 바로 아래 카펫을 벗어난 맨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기자는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워있었으나 그 형상은 반듯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바지에 흰색 민소매티를 입고 있었던 지 씨의 복부는 마치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빵빵한 풍선처럼 불룩 솟아 나와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미처 감지 못한 두 눈은 공포에 질린 듯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고 눈가와 입술에는 검은색 쉐도우와 립스틱이 두껍게 발라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허리까지 왔던 지 씨의 파마머리는 마치 아이가 서툰 가위질을 한 듯 삐뚤빼뚤 잘려나가 있었으며 면상 가득 의문의 액체가 뿌려진 채 말라붙어 있었다고 했다.
경찰은 지 씨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정밀 부검을 의뢰했다고 했다. 시신의 외관상 폭행이나 마약, 경부압박 등 이렇다 할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 가운데 경찰이 가장 주목한 건 숨진 지 씨의 온몸 곳곳 순간접착제로 붙여놓은 현란한 오색 큐빅들이었다. 수천 개의 큐빅들은 대부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으로 지 씨의 몸을 뒤덮고 있었으며 경찰은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고 했다.
지 씨의 쇄골과 가슴 사이, 큐빅으로 완성된 ‘peace’
얼마 전 평창동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과 동일한 살인마의 표식이었다.
이를 두고 경찰은 프로파일러 투입과 함께 지 씨 생일파티에 동석한 지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번 사건이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평창동 연쇄살인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경찰은 마구잡이로 양산될 추측과 공포를 미리 차단하는 모양새였다.
“평화라…… 평화…….”
기자의 부연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보도가 여기까지였다면 가인과는 무관한, 한 연예인의 다소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불과했을 터였다. 그러나 영원이 가인에게 직접 뉴스를 보라고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도 말미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숨진 지경하의 손에 쥐어져 있던 명함 때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지 씨가 손을 뻗은 채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명함은 약간 구겨져 있었으며 그 옆으로 엎어진 쓰레기통과 피우다 만 담배꽁초가 놓여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명함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최근 추락한 이미지 회복을 위해 지 씨 소속사와 접촉이 있었던 몇몇 복지재단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의문이 증폭된 가운데 경찰은 기자들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이슈 거리를 흘렸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법한 얼굴이 알려진 재단 대표의 명함이라는 정보였다.
“……그래서 영원이가 급했구나.”
지 씨에 대한 보도가 끝나자 가인이 tv를 껐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피곤했던 하루를 완전히 잊게 만든 예측 불가의 소식이었다.
마치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처럼…….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가인에게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올 무렵, 폰이 울렸다.
영원이었다.
-“뉴스 봤어?”
“응.”
-“그 명함 말이야, 가인이 네 거, 맞지?”
“그런 것 같아. 경찰은 일부러 정보를 흘린 거고. 수사 압박을 받지 않으려면 이목을 분산시켜야 하니까.”
-“내 말이. 근데 지경하 생일파티에 너도 초대받지 않았어?”
영원이 물었다. 그녀가 우려하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며칠 전 가인은 지경하로부터 생일파티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았었다.
“맞아. 근데 거절했어. 너도 알다시피 어제는 부모님 기일이었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나저나 지경하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이 네 거라는 게 알려지면 기자들이고 악플러들이고 또 마구 들쑤셔댈 텐데…….”
벌써부터 눈앞에 선한 듯 긴 한숨을 뱉어내는 영원에 가인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정보를 흘린 경찰과 덥석 그것을 물어버린 기자들에 의해 이미 만천하에 알려진 마당에 가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가 노력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시끄러워질 얼마간의 시간들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그것뿐이었다.
‘지경하가 왜 내 명함을 손에 쥐고 있었을까……?’
가인은 도통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현장은 수많은 가설과 증거만을 남길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 범인만 잡히면 금방 사그라질 테니까.”
영원과의 통화를 마치고서야 가인은 잊고 있던 피로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당장 내일 일어날 일조차 떠올리기 싫을 만큼 무겁게 짓누르는 해악의 향연이었다.
뒤늦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가인이 곧 불도 켜지 않고 들어선 방안 침대 위에 쓰러지듯 그대로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면제에 손을 뻗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