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수요일. 레갈로(regalo) 레스토랑
은은한 포인트 조명 아래 사각 테이블 안쪽으로 가인이 홀로 앉아있었다.
3주 전 재림과 식사했던 자리 그대로 가인이 다시 예약한 거였다. 물론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잠시 후,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가인이 일어섰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대답과 동시에 가인이 영원과 함께 서있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안도영이었다.
“여기 인사해. 내 남자친구.”
“안녕하세요. 안도영입니다.”
영원보다 약 30cm가량 키가 큰 안도영은 육중한 덩치에 쌍꺼풀진 커다란 눈, 굵직한 이목구비가 마치 운동선수 같은 상남자 스타일이었다.
가인과 엇비슷한 아담한 키에 작은 체구, 오목조목 야무지게 생긴 영원과는 사뭇 대조적인 외형이었다.
“이가인이에요.”
인사를 나눈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어색한 공기가 맴돌기 전 식사를 주문했고 메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 대화는 곧, 스스럼없는 일상 대화를 이끌었다.
“도영 씨가 2살 연하라고 들었는데, 막상 뵈니까 오빠 같네요.”
“제가 나이보다 좀 들어 보이긴 하죠. 영원이가 워낙 동안인 것도 있고요.”
“꼭 외형적인 면이라기 보단 말에서 책임감이 느껴져서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가인의 눈빛에 영원이 도영을 부추겼다.
“어디 괜찮은 사람 없어? 가인이 소개 좀 시켜줘.”
“내 주위에는 대표님 스펙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는데…….”
“가인이는 그런 거 안 따져. 왜냐! 얘가 다 있으니까.”
“정말, 상관없으세요?”
여자 친구의 말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영이 되물었다.
첫인상부터 귀티가 줄줄 흐르는 아우라에 감정 없는 도도한 눈빛이 누구라도 다가가기 쉽지 않은 가인의 이미지였다.
이제껏 도영이 그녀와의 만남을 꺼려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네. 근데 제가 안 따지면 뭐해요. 항상 상대가 따지는데.”
“아차차! 그러네요. 그래도 한 사람 생각나긴 하는데…….”
“전 괜찮으니까 영원이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지해진 화두에 부담을 느낀 가인이 서둘러 말을 끊었다.
“제 지인 중에 진짜 괜찮은 형이 있거든요. 물욕이나 명예욕 일도 없는.”
“어머,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 근데 그렇게 살면 인생 되게 재미없겠다.”
“아니야. 가치관이 뚜렷해서 시간낭비를 안 하는 사람이야.”
“그래? 그러면 가인이와 어울릴 수도 있겠는데?”
영원이 말을 보태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가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두 사람, 결혼하기로 한 거예요?”
“네.”
도영의 대답에 자신감이 넘쳤다. 결혼에 대한 강한 의지의기도 했다.
“맞다! 그때 사무실에서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수현 씨가 들어오는 바람에 못하고 나갔었네.”
“괜찮아. 말 안 해도 알겠던데 뭐.”
“……미안.”
“뭐가 미안해? 너 결혼하는 거?”
“아니, 그냥…… 너도 옆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아쉬움이지.”
“내가 외로워 보여? 그래 보여요?”
영원과 마주 보던 가인의 시선이 도영을 향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가인의 눈빛에는 한껏 자존심이 차올라 있었다.
“전혀요. 그리고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면 100% 헤어져요.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봤지?! 어떻게 6년 본 너보다 처음 본 도영 씨가 나를 더 잘 아니?!”
“그 큰 저택에 매일 혼자 있으니까 그렇지.”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면 헤어진다잖아. 그리고 영원이 네가 있는데 뭘 걱정해. 결혼한다고 멀리 떠날 것도 아닌데…….”
“대표님은 재단 일에 애정이 많으신가 봐요?”
가인이 웃음 짓는 와중에 도영이 물어왔다. 다소 뜬금없는 화두였다.
“네. 저는 항상 사각지대를 잘 살피거든요.”
“역시, 영원이에게 듣던 대로네요……. 참! 여기 평창동에서 연쇄살인사건 일어났다던데, 아직 범인 안 잡힌 거야?”
언제 기사를 봤는지 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원을 돌아봤다. 평창동에 거주하는 그녀였기에 남자친구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응. 아파트 경비원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되긴 했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못 찾았다나 봐.”
“그럼 그 용의자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거야? 난 범인이 잡힌 줄 알았는데…….”
용의자를 찾았다며 떠들썩했던 지난 기사에 내심 안도했던 가인이 실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나보다 가인이가 걱정이야. 얼굴도 알려진 데다 그 큰 집에 혼자 사는 거 세상이 다 알잖아.”
“시신이 발견된 현장만 보면 범인은 외부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내 걱정은 넣어둬.”
마치 당장이라도 가인에게 일이 벌어질 양 초조하게 바라보는 영원에 가인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하고 있느니 미리 조심하는 게 낫지. 가인이네 동네는 밤 9시 전부터 유령도시 되니까 더 늦기 전에 지금 일어나자.”
영원의 제안에 세 사람이 곧 식당을 나왔다.
***
청담동.
토요일 새벽 4시 18분.
현관에서 이제 막 마지막 손님을 배웅한 지경하가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거실로 들어설 때였다.
딩-동!
짧게 초인종이 울렸다.
“영주 얘는 뭘 또 놓고 갔길래.”
방금 전 돌아간 후배 장영주 일거라 여긴 지경하가 인터폰을 확인할 생각도 없이 곧장 문을 열었다.
철컥! “어머! 이게 다 뭐야?”
활짝 문을 연 그녀 앞에 새빨간 장미꽃으로 가득 채워진 꽃바구니가 인사를 대신했다. 그 뒤로 새로운 손님이 얼굴을 드러냈다.
“좀 늦었지만, 어서 와요!”
새벽 4시 20분, 대형 꽃바구니에 한껏 텐션이 올라간 지경하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
토요일 밤.
이제 막 연회장을 빠져나온 가인이 수현이 대기하고 있던 차량 안으로 들어섰다.
“후우…… 피곤해.”
연말이 가까워지며 각종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느라 가인은 피로가 쌓이는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은 30여 개의 중견기업인들이 모임을 갖는 날이었다.
물론 가인이 반기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초대장을 받은 이상 재단을 알리고 후원금을 늘리기 위한 대표의 참석은 당연한 의무이자 일의 연장선이었다.
그런 이유로 평소 후원금 및 물품기부, 자원봉사 등에 호의적이었던 기업 리스트를 미리 뽑아놓은 가인은 선별적 인사를 건네며 얼굴도장을 찍은 후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그곳을 빠져나왔다.
기자들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슈 거리가 필요한 그들에게 그녀의 등장은 단연 이목거리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인터뷰 보다 사진촬영이 주를 이뤘다는 거였다. 개중에는 간혹 과거를 들추며 여전히 아픈 곳을 파고드는 야비한 기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가인은 불쾌한 내색 없이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서였을까……? 차 안에 들어선 그녀는 무척 지쳐있었다.
“바로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다리느라 수고했어.”
좌석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가인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수면제 없이도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데 얼마 못 가 눈을 뜬 가인이 가방 속 핸드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설정해 놓은 모드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어?”
폰을 꺼낸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연회장에 머무른 사이 다섯 번의 부재중 전화가 왔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발신자는 모두 하영원이었다.
“한참 데이트 중일 텐데, 왜 전화했지?”
고개를 갸웃한 가인이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어 영원아!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인지 늘 밝았던 영원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기업인 모임 있어서 참석했다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근데 왜?”
-“그럼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뉴스부터 봐봐.”
“뉴스? 왜? 무슨 일 있어?”
-“보면 알아.”
말을 아낀 영원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목소리가 가라앉았지?”
답답함에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려던 가인이 이내 폰을 내려놓았다. 영원이 뉴스를 보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잠시 후, 그녀의 집 앞에 차량이 멈춰 섰다.
“같이 들어가 드릴까요?”
가인이 차량 문을 열기 전 수현이 물어왔다. 뉴스를 보라는 영원에 혹시라도 가인이 충격을 받을까 싶어서였다.
“아니. 오늘은 너도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수고했어.”
“네.”
대문 앞 먼발치에서 가인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자 수현이 그제야 발길을 돌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고급 저택만 모여 있는 요새 같은 동네는 길고양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인적이 드물고 고요했다.
순간 동네를 벗어나려던 수현의 발길이 멈춰 섰다. 뭔지 모를 불길한 직감이 그녀를 돌아서게 한 거였다. 곧 발길을 돌린 수현이 가인의 집 담벼락을 따라 움직였다.
“……꿀꺽.”
인기척이 없는 가운데 수현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은 분주했지만 담벼락을 따라 걷는 그녀의 운동화가 더없이 차분한 이유였다.
“후우.”
잠시 후, 수현이 짧은 호흡을 뱉어냈다.
우려와 달리 그곳에는 오직 수현 혼자 숨바꼭질을 하는 모양새였다. 직감이 빗나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셈이었다.
‘혼자 뻘짓했네.’
담벼락 끝에서 확인을 마친 수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