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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Dec 26. 2024

15화. 모두에게 좋은 하루는 없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헉헉…… 정말 죄송합니다. 차가 밀려서 그만…… 헉헉…… 지금 지경하 씨 도착했습니다.”



몹시 미안한 얼굴의 김경수 뒤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목을 꼿꼿이 세운 지경하가 들어섰다.


이미지 회복을 위한 자리인 만큼 평소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잘 연출된 모양새였다.





어릴 적 요정 같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잘 다듬어나간 관리받은 연예인 미모였다. 그러나 난처해하는 매니저와 달리 귀찮은 양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이 그녀의 검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여기 다 계셨네요. 빨리 시작하죠. 오후에 개인 스케줄이 있어서요.”



문 앞에 선 지경하가 김경수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그가 문을 열었다.


모두가 가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대로 나가버린 지경하를 제외하고는.



“우리도 나가죠. 아이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가인이 움직이자 모두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



예정보다 무려 1시간 가까이 늦어진 보육원 행사는 다행히 순조로웠다.


보육원 원장과 기부금 전달식을 촬영한 지경하는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댈 때만 아이에게 다정했고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기자들은 기계처럼 사진을 찍어댔다. 하나같이 소속사와 연결된 기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지경하의 민낯은 카메라가 없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보육원 아이들을 마치 오랜 거리 생활로 지저분해진 유기견을 대하듯 했다. 중간중간 코를 막거나 촬영 직후에는 반드시 손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심지어 아이를 안은 후에는 불쾌해하며 옷을 털기도 했다.


영원은 그런 경하를 보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반면 가인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그 모습이 저 배우의 본성이라 여기며.


설령 지경하가 인기 스타가 되지 못했더라도 저런 삶을 살았을 거라는 게 가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후, 아이들과 어우러진 단체사진을 끝으로 행사는 마무리됐다.



“저기 대표님!”



차량에 올라타기 전 지경하는 사진요청과 함께 가인의 개인연락처를 물어왔다. 물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인에 대한 호감은 아니었다.


다만 여간해선 만나기 어려운 저명인사였기에 경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목적이야 뻔하디 뻔한 인맥 쌓기 용, sns에서 핫 할 만한 인물이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사진요청에 응한 가인이 명함과 함께 연락처를 건넸다. 의아해하는 영원과 수현을 뒤로한 채.



**



우여곡절 끝에 일정을 마치고 가인과 영원 그리고 수현이 차량에 올라탔다.


살짝 피곤한 기운이 젖어든 가운데 먼저 화두를 꺼낸 건 영원이었다.



“지경하 말이야, tv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이중적이더라.”



험담을 하는 건 본래 그녀의 성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야겠다 싶었다. 종일 참고 인내한 영원이었으니. 지경하에게 이용당한 보육원 아이들 때문이었다.


영원의 말에 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던 가인이 고개를 돌렸다.



“tv에서 볼 때도 이중적이었어?”

“이미지야 가리고 꾸미면 얼마든지 만들지만 말이라는 건 속에서 나오잖아. 처음엔 요정 이미지라 말을 아꼈지만 그 바닥에서 도가 트니까 자연히 본성이 나오는 거지.”

“인터뷰 때 그랬구나.”

“어. 근데 오늘 보니까 생각보다 더 이기적이야. 개념도 없고.”



그때였다. 운전 중이던 수현이 전방을 주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지 회복하겠다고 이런 발상을 하는 것부터가 잘못 큰 거죠.”



오가는 대화 속, 듣고 있던 수현이 단호히 말을 보탰다.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아이들을 이용한 지경하의 만행에 일종의 분노를 표출한 거였다.


그러자 영원과 가인의 시선이 일제히 수현에게 쏠렸다. 운전 중 수현이 대화에 끼어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수현 씨 말이 맞아. 18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했는데 27살에 고작 생각해 낸 게 이거면 잘못 큰 게 맞지.”



영원이 수현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반면 가인은 연예인 얘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는 일요일, 공재림과 만날 생각에 그녀는 피곤한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중이었다.


지경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 있을 시간일 테니.



***



일요일.


아침부터 괜히 분주했던 가인이 교회를 나와 곧장 배식소로 향했다. 노숙자 점심배식 후 공재림을 따라 치과의사로서의 면모를 참관하고 저녁식사를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재림이 자신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다는 건 가인도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실로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본 혼란이었다.


12년 전, 거짓 환상으로 그녀를 속였던 12살 연상의 그놈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비운의 상속녀’라는 원치 않은 꼬리표에 살짝 미소만 흘려도 죄가 되는 시선 속에서 가인은 왠지 모르게 공재림이란 존재가 자신을 꺼내줄 것만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끝도 오지 않았으니까.


지금이야 감정에 무관심한 공재림이지만 가인은 반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재림은 자신과 같은 사연이 많은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가인은 면밀히 관찰한 자신의 촉을 믿었다.



“공재림 선생님, 부담스러울 만큼 친절한 사람만 가면 쓴 거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게 가면인데, 너무 순진하시네.”





**



배식 후 치과의사 공재림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가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노인과 함께 그녀를 치과로 데려가 치과의사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나타나지 않을 거라 여겼던 가인의 등장에도 재림은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한 반가움도 들뜬 모습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재림은 내내 차분했고 자신이 종로에 온 목적을 오롯이 반듯하게 수행했다.


오후 5시 40분, 노인을 보낸 재림이 먼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인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배고프시죠?”

“선생님이 더 배고파 보이시는데요?”

“사실, 맞습니다. 제 배꼽시계가 하도 정직해서 뭐만 했다 하면 아우성을 치거든요.”



살짝 피곤한 기색에도 유쾌한 재림에 가인이 웃음을 보였다.



“오늘은 선생님이 추천해 주세요.”

“그럼 국밥 어떠세요? 근처에 동기 만나러 올 때 자주 가는 식당이 있거든요.”

“좋아요.”



내심 거절하길 바랐던 가인이 흔쾌히 응하자 재림이 쓴웃음을 지었다.


두 번 다시없을 기회를 그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



식사를 마친 재림과 가인이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표님 덕분에 저도 혼밥 안 하고 잘 먹었네요. 아! 그리고 사주셔서 더 맛있었어요.”

“저도 선생님 덕분에 거르지 않았어요. 오면서 보니까 근처에 디저트 카페가 있던데, 같이 가실래요?”



가인의 제안에 소매를 걷어 올린 재림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어떡하죠?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급한 약속 아니시면 한 시간 정도 어떠세요?”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가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라 여기지도 않았다.


‘후회’라는 것만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없었으니까.



“음…… 좋습니다! 대신 오래 있지 못하는 건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



같은 날 평창동저녁 7시 13.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온 한 남자가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짙은 그레이계열의 명품 골프웨어로 한껏 멋을 낸 그는 50대 중후반의 작은 키에 머리숱이 적고 배가 불룩한 중장년의 남자였다.


거기다 날카로운 눈빛에 숯검댕이 같은 눈썹, 퉁퉁한 볼과 두꺼운 입술이 한 눈에도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 남자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잠시 후,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가 내렸다.


그가 로비를 걸어 나오자 운전기사로 보이는 양복차림의 또 다른 남자가 차량 문을 열었다. 그러자 중장년의 남자가 고급 세단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좌석 시트에 머리를 기댄 남자가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각 오피스텔.



침대 옆, 작은 원형테이블 위로 고급 양주와 거의 손대지 않은 과일 안주가 놓여있었다.


여유 공간이 많지 않은 오피스텔 바닥에는 흐트러진 수현의 옷가지와 속옷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 현관문이 닫히자 홈가운을 걸친 수현이 다급히 문을 걸어 잠그고는 욕실로 뛰어 들어가 곧장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소나기가 퍼붓듯 강한 물줄기가 가운도 벗지 않은 그녀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수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의 어깨만이 들썩거렸을 뿐…….


수현은 울고 있었다.



“네 딸이…… 나랑 동갑이야. 이 쓰레기새끼야!”



쾅! 쨍그랑!!


거친 욕설에도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참다못한 수현이 급기야 샤워부스 유리벽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와르르 무너져 내린 유리벽이 바닥에 흐트러지며 빨갛게 물들었다. 부르르 떨고 있는 수현의 주먹에서 사정없이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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