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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Dec 24. 2024

14화. 그는 정말 범인일까?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방으로 들어선 가인이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평소의 그녀라면 낯선 상대에 영원이라도 불러냈을 자리였다. 그런데 공재림과 함께하는 그 긴 시간 동안 가인은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돌아가신 부모님과 잃어버린 남동생마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음지의 과거를 그가 잊게 한 거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익숙한 친구처럼 가인은 재림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어.”



노숙자와 유기견 그리고 자신을 일관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재림에 가인이 서운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면 뭔가 신선하기도 했다.


대부분 측은함, 동경, 질투, 가식, 위선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그녀를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데다 그것이 가인에게도 익숙한 시선이었으니까.


그런데 공재림의 눈빛은 그들과 달랐다. 대화 내내 재림은 가인에게 뼈아픈 가족사나 재력에 관해 물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인의 배경은 그녀를 평가하는 어떤 기준도 되지 못한 거였다. 비록 과거 결혼 사실을 숨기긴 했으나 앞으로도 드러날 일은 없기에 가인은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34살의 그녀가 더 이상 순수할 수 없었던 건 너무 어린 나이에 ‘비운의 상속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인이 소유한 다수의 노른자 땅과 고층 빌딩, 회사를 매각하며 사들인 미래유통 주식까지…… 그녀가 지닌 재력의 힘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물론 가인이 온전히 공재림을 순수하게만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한 척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던 속물들도 꽤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가인도 딱히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재림과 함께 있을 때면 묘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밥친구,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았어.”



문단속을 마치고 침대에 누운 가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무인경비시스템이 작동되긴 했지만 텅 빈 방이 즐비한 저택에서 혼자 잠이 들 때면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집에 있는 느낌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전, 가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금세 잠이 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늘진 그녀의 일상이 한 남자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는 중이었다.



**



적막이 맴도는 고요한 어둠 속, 한 남자가 주택가 담벼락을 서성였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가인의 집 앞이었다.


검은색 가죽재킷에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체구가 크지 않은 마른 체형의 남자는 까치발을 들며 보일 리 없는 가인의 저택을 들여다보려 무척 애를 쓰는 모양새였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늘어져 내려앉은 눈꺼풀에 바짝 힘을 준 그는 내내 가인의 집을 주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노려보고 있었다.


5분.. 15분.. 30분..


그렇게 밤을 새나 싶을 만큼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남자는 때마침 지나는 행인들의 의심쩍은 눈길을 의식하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린 재림이 냉장고에서 꺼낸 캔 맥주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낙산공원에 들러 서울 야경을 둘러본 재림은 조금 전 집으로 돌아왔다. 속이 답답하거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종종 그가 찾는 명소였다.



“왜 나를 궁금해하지?”



시원한 청량감에 목을 축인 재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가인이 명함을 건넬 때까지만 해도 재림은 별 생각이 없었다. 카드를 돌려주기 위해 재단 대표가 직접 왔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차피 레벨이 다른 삶인 데다 대표에게 어떤 호감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가인 또한 자신을 같은 시선으로 봤을 거란 생각에 재림은 딱히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연 같은 오늘의 만남이 이유 있는 대표의 행보였다니.


물론 이가인이 호감을 보인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상류층의 삶에 따분함을 느낀 황금수저가 호기심에 서민을 찔러보는 것뿐이니까.


금세 한 캔을 비운 재림이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핸드폰을 켠 그는 sns 그룹 채팅창에 접속해 종일 확인하지 못한 대화를 읽어 내려갔다.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분명, 도와줄 거야.”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재림이 곧 불을 끄고 누웠다. 딱히 잠이 오진 않은 탓에 몸을 뒤척이던 그의 머릿속에 노인과 유기견 그리고 이가인이 떠올랐다.


‘대표에게 밥친구라…… 괜한 오지랖을 떨었나?’


재림은 일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에너지소모가 많아 피로를 유발하는 무분별한 인맥 쌓기는 그가 지향하는 삶이 아니었기에 재림은 그녀와 만남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단지 약속이 없는 주말 저녁은 끼니를 거른다길래 형식적인 배려를 해줬을 뿐.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의도와 상관없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잠시 간과했다.



“어차피 엮일 일 없어.”



쓸데없는 생각의 꼬리에 재림이 눈을 감았다. 2주 후 대표가 배식소에 나타날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정확히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인간다움’이 없는 그녀의 얼굴은 어렵게 희망을 찾은 재림에게 웃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 이가인이 나타난다면…… 재림은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뉴스 속보가 오전부터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하는 중이었다.


출근준비를 마친 가인 또한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 평창동 다원파크 공원에서 숨진 고 씨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가 검거됐기 때문이었다.


살해수법이 잔인하고 용의주도한 데다 연쇄살인 정황이 다분하여 온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은 사건이었기에 인력을 늘린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펼치던 가운데 얻은 큰 수확이었다.


용의자는 숨진 고 씨가 거주하던 아파트 경비원 68세 최모 씨로 그가 의심을 받기 시작한 건 최 씨가 머무는 경비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주사기 때문이었다.





만성 당뇨로 자가 인슐린 주사를 놓던 최 씨가 따로 모아놓은 주사기 봉투에서 고 씨의 혈흔이 묻어있는 주사기가 발견된 거였다.


경찰은 최 씨를 추궁했으나 그는 살인에 쓰인 주사기가 왜 이곳에 버려졌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08동 최 씨 경비실을 비추는 아파트 cctv는 10m 거리 가로등에 위치해 있었으며 영상분석결과 고 씨가 살해된 이후 경비실을 드나든 인물은 택배기사와 아파트 주민들, 최 씨의 아내와 아들이 전부였다.


조사결과 택배기사 및 네 명의 주민은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확인됐다. 그러나 주민 가운데 검은 모자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체구가 작은 남자는 결국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


최 씨 아내도 알리바이가 확인됐다. 반면 최 씨의 아들은 사건 당일 행적이 명확지 않았다. 사건 당일 밤 그가 아버지를 찾아 이곳에 왔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들은 쌀쌀해진 날씨에 구입한 패딩을 아버지께 직접 전하고자 왔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살해된 고 씨와 같은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최 씨 아들은 자신은 부서가 다른 영업팀인 데다 연구원이었던 고 씨와는 일면식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경찰은 생전 고 씨가 경비원 최 씨 부자와 다툼 혹은 원한을 살만 한 일이 있었는지 수사에 착수하는 한편, 사건이 중대한 만큼 증거인멸 및 도주를 우려해 최 씨 부자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tv를 끈 가인이 일어나 돌아서자 현관 한쪽에 서있는 수현이 보였다.



“지금 출발하면 10시까지는 도착하겠지?”

“네. 준비할까요?”

“응. 같이 나가자.”



가인은 수현과 뉴스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괜한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



수요일.


오후 3시가 넘어가자 누리보육원이 안팎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상주하고 있던 기자들과 더불어 노아복지재단에서 준비한 생필품 및 각종 선물에 뛰쳐나온 아이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끝났어야 할 후원금 전달식 및 아이들을 위한 행사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지 세탁을 위해 봉사활동을 고안한 지경하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이었다.


차갑게 굳은 가인에 영원은 조바심이 났고 수현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봤다. 지경하의 집요한 요구에 재단 대표인 가인이 반강제적으로 참여한 자리였다.



“아니 본인이 오후 3시로 정해놓고 왜 안 오는 거야?”



참다못한 영원이 투덜거렸다.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그냥 진행하세요.”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는 원장실 벽시계에 가인의 날 선 시선이 향했다. 가인이 화가 난 건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들인 지경하의 오만이 아니었다. 27살이 되도록 시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의 망각 때문이었다.


똑딱똑딱 똑딱똑딱


10분이 흘러 3시 30분이 되자 차분한 얼굴로 가인이 일어섰다. 지경하를 기다리느라 무려 30분을 낭비해 버린 후였다.



“시작하시죠. 지경하 씨가 내기로 한 후원금은 제 사비로 충당할게요.”



상황을 정리한 가인이 밖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한 남자가 다급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경하 매니저 김경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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