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퓨전음식을 즐겨진 않으시나 봐요.”
“대표님은요? 오늘 여기 오지 않았다면 뭘 드셨을 것 같아요?”
“……글쎄요, 혼자 해결하는 저녁은 보통 거르거나 샌드위치로 때우는 편이라서요.”
살짝 당황한 가인이 감정을 숨긴 채 에둘러 대답했다. 영원을 제외한 누구도 이제껏 그녀에게 ‘주말 식사’를 물어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뻔한 호구조사나 취미 따위의 형식적인 관심이 아닌 사소한 일상을 주고받는 대화가 가인은 무척 흥미로웠다.
“한마디로 약속이 없는 일요일 저녁은 보통 혼자 계신다는 의미네요.”
손쉽게 가인의 일상을 꿰뚫은 재림이 개구진 눈웃음을 보였다.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보통의 시시한 눈빛과는 분명 다른 결이었다.
“선생님은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부모님과 저, 딱 세 식구예요.”
“의외네요. 형제가 많을 것 같았는데…….”
“부모님이 아이를 갖지 못하다 늦둥이로 저를 낳으셨어요.”
“그럼 사랑 많이 받고 자라셨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경찰이셨던 아버지가 꽤 엄한 편이셨거든요.”
재림의 대답에 가인이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과거 이소원 유괴살인사건으로 집에 들이닥쳤던 경찰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당시 경찰이 괴물로 보였던 가인은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다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누구보다 선생님을 아끼셨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가인에 재림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항상 말씀하셨거든요. 사는 동안 세상에 늘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네요.”
“네. 사소하더라도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면 잔인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노력 중입니다.”
자연스레 알게 된 부친의 부재에 가인은 뭔가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결코 친분이 있다 할 수 없는 상대와 2시간에 걸쳐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인에게 어떤 확신이 선 건 아니었다. 공재림의 눈빛은 분명 다정하고 진솔했지만 지극히 객관적인 선을 넘지 않고 있었으니까.
“부친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 여쭤보면 실례일까요?”
“전혀요. 5년 전 17살 고등학생이 부모 몰래 끌고 나온 차량에 치어 돌아가셨어요.”
“아…… 안타깝네요.”
“퇴직하시고 이제 좀 편히 쉬시려나 했더니 거의 못 누리고 가셨어요.”
그때가 떠올랐는지 재림은 잠시 그늘진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금세 떨쳐버리고는 이내 밝은 모습을 보였다.
“슬픔은 삼키기만 하는 것보다 드러내는 게 오히려 마음을 승화시킨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위한 말씀인가요?”
“아니요. 우리를 위한 말이죠.”
‘……우리?’
가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실로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반면 재림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다. 딱히 감정이 실린 대화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단지 그는 이 시간을 그저 즐겁게 채우고 싶을 뿐이었다.
지나고 나면 음지 속에 숨었던 시간들이 가장 후회되니까.
**
레스토랑을 나와 가인을 태운 재림의 차량이 곧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최근 평창동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살인사건을 재림도 알고 있었기에 괜찮다는 가인을 그는 차에 태웠다.
그렇게 식당가를 벗어나 차량이 동네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저기 대표님, 괜찮으시면 한 10분만 늦게 가도 될까요?”
“네.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오지랖이긴 한데, 아무래도 저 강아지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딱 10분이면 됩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어딘가를 가리키는 재림에 가인이 고개를 돌리자 누런 털의 강아지 한 마리가 거리를 배회하는 게 그녀 눈에 띄었다. 한 눈에도 지저분한 털에 뱃가죽이 뼈에 붙은 것이 꽤 오래 굶주린 떠돌이 개였다.
차량에서 내린 재림이 강아지가 아닌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한 손에는 뭔가 꽉 찬 봉투를, 다른 손에는 빈 박스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그가 강아지에게 다가가자 몸을 바짝 엎드린 강아지가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떠돌긴 했어도 사랑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강아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재림이 곧 편의점 옆 한구석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봉투에서 방금 구입한 수건을 꺼내 상자에 펼친 그는 스텐 밥그릇 가득 사료를 부었다. 그러자 헬리콥터 꼬리를 돌리며 강아지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강아지를 지켜보던 재림은 조용히 물그릇을 놓고는 차로 돌아왔다.
그가 가인에게 약속한 시간, 정확히 10분 후였다.
“이제 출발할게요.”
“저기가 이제 강아지 집인가요?”
“아니요. 편의점 사장님께 내일 보호소에서 데려갈 때까지만 봐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아……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거죠. 입양이 안 되면 저 녀석 목숨도 보장 못해서 빨리 알아봐야 하거든요.”
“책임감이 강하시네요. 오늘 처음 본 유기견인데.”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는 거죠. 결과야 인간의 영역이 아니지만 최선은 인간의 영역이니까요.”
재림의 차량이 움직이자 가인이 힐끗 그를 돌아봤다.
“선생님은 결혼 안 하세요?”
“독신주의나 비혼주의자인지 물어보시는 건가요?”
“네. 인기 많으셨을 것 같아서요.”
“아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딱히 정해놓은 건 없어요.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요.”
모호한 대답과 함께 재림이 룸미러를 통해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을 살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니 오히려 표정이 읽히는 그녀였다.
“대표님은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한결같은 사람이요.”
“아, 한결같은……. 중요한 포인트네요. 그런 분, 꼭 만나실 거예요.”
잠시 후, 동네에 들어선 재림의 차량이 커브를 돌아 가인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감사해요.”
차에서 내린 재림이 빠르게 이동해 동승석 문을 열자 가인이 내렸다.
“배도 부르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재림이 제법 쌀쌀해진 밤 기온에 어깨를 움츠리며 운전석으로 걸어가려는 찰나였다.
“선생님!”
뭔가 용기를 낸 가녀린 음성에 재림이 돌아섰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실은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지금 물어보세요. 뭐든.”
어두워진 하늘 가운데 재림이 활짝 웃어 보였다. 유독 웃음이 많은 그의 얼굴은 피나는 노력 끝에 찾은 희망이었다.
“선생님은 왜, 노숙자나 유기견이나 저를 대하는 눈빛이 똑같으세요?”
“달라야 할 이유가 있나요?”
살짝 불쾌함이 묻어난 가인의 질문에 재림이 단호하게 되물었다. 재림으로서는 굳이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지도, 또 좋은 인상을 남기고픈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럼 제게도 측은한 마음에 식사 제안을 하신 건가요?”
“아니요. 저는 대상이 누구든 측은한 마음으로 다가가진 않습니다. 말 나온 김에 오지랖 좀 더 부리고 가자면…….”
살짝 망설이던 재림이 대화를 끝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웃음을 참지는 마세요. 그럼 웃는 법을 아예 잃어버리거든요.”
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가인은 자신을 위한 조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치과의사답게 형식적인 미소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건치의 차이를 알아본 거였다.
“선생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뜬금없는 재림의 오지랖답게 가인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살짝 당황한 재림이 이내 웃음을 보였다.
어차피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노아복지재단 이가인 대표와는.
“그런 거 없어요. 다만, 늘 과하게 친절한 사람은 피하는 편이에요.”
“……왜요?”
“가면이니까요.”
다소 색다른 재림의 논리에 가인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평범하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제게 조언 좀 해주세요.”
“조언이요?”
“네.”
“뭐, 제가 조언할 자격은 없지만 말씀해 보세요.”
“저는 어떤 남자를 만나면 안 될까요?”
뚫어져라 시선을 맞추며 물어오는 가인에 눈치 빠른 재림이 그 속을 꿰뚫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인성 빼고 다 가진 사람이요.”
“……그럼, 좋은 사람을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달빛 아래 드러난 가인의 반짝이는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재림도 웃음기를 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좋은 사람까지는 모르겠지만 여가 시간을 어디에 가장 많이 할애하는지 보세요. 돈을 소비하는 패턴도요. 그럼 상대가 좀 보일 거예요.”
“선생님은요?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시는데요?”
“관심인가요? 아니면 설문인가요?”
“네? 아, 그게…….”
지나치게 몰입했던 탓인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인이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에이 농담한 건데, 너무 진지하게 받으셨네요.”
“……제가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2주 후에 어르신 뵈러 올 건데 만약 그때도 저녁약속 없으시면 배식소로 오세요. 한 번 더 밥친구 해드릴게요.”
잠시 후, 재림의 차량이 가인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