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ㅅ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가인의 짧았던 결혼생활……. 1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숨겨진 아픔이었다.
“맞다 카드!”
깜짝 놀란 가인이 급히 재킷주머니에 손을 넣자 그녀 손에 한 장의 카드가 잡혔다.
“아까 돌려줬어야 했는데…… 어쩌지?”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공재림의 신용카드에 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빛치과 원장 김기준과 안면을 트긴 했으나 당장에 의료봉사를 또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재림에게 카드를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 한 번 더 만나보면 이 혼란이 뭔지 확실해지겠지.”
소파에서 일어난 가인이 장식장 속, 뱅갈고양이 사진이 담긴 액자를 꺼내 들었다.
3년 간 그녀의 가족이 되어준 유일한 생명체.
호랑이와 표범을 연상시키는 털 무늬로 카리스마 있는 생김새와 달리 애교가 많고 활동적인 탓에 집 밖을 자주 들락거리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올여름, 그만 고양이가 죽고 말았다.
정원에서 비틀거리는 녀석을 보고 가인이 뛰쳐나갔을 때였다. 놀란 가인은 고양이를 안고 황급히 동물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아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였다.
고양이를 살핀 수의사는 대게 이런 경우 심장마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가인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고양이가 죽었다고 여기며 자책했었다.
그런데 평창동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불현듯 묘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첫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날 그녀의 반려묘도 죽은 데다 두 건의 살인사건 모두 독극물에 의한 심장마비가 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마 반려묘를 훼손할 수 없어 부검을 포기한 가인이었지만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연쇄살인의 첫 시작이 자신의 고양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성립된 이유였다.
액자를 높이 든 가인이 고양이와 시선을 맞췄다.
“뮤, 거기서 행복하니……? 나중에 만나자.”
***
일요일.
예배를 마친 가인이 서둘러 교회를 나와 종로 3가로 향했다. 지난주 치아검진 및 배식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표인 가인이 현장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오늘의 배식 또한 일정에 없는 스케줄이었다.
터벅터벅
차량에서 내린 가인이 급히 배식소로 향했다.
그녀는 지난주 공재림과 실랑이를 벌이다 공짜 틀니를 하게 된 노인을 찾고 있었다. 행여 공재림이 일찍 노인을 데리고 사라졌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가인은 비서 수현을 통해 카드를 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쉬운 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야 공재림을 다시 만날 명분이 생기니까.
두리번거리던 가인의 시야에 허겁지겁 죽을 삼키는 한 노인이 들어왔다.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한쪽에서 쌀빵과 유산균 음료를 나눠주고 있는 공재림이 눈에 띈 탓이었다.
정신없는 그의 옆으로 가인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어?”
다소 놀란 듯 빵을 챙기던 재림의 손이 멈췄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 그럼 저야 감사하죠.”
1시간 후.
“저기 이거…….”
배식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재림 뒤로 따라 나온 가인이 챙겨 온 카드를 내밀었다.
“지난번에 드렸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
“아니에요. 다시 만나면 그때 달라고 할 참이었어요”
“……다시요?”
특별한 의미가 담기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가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미 수많은 상상 속에 설레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표님인 줄 몰라 뵀어요.”
재림이 지난 일을 사과하며 대표라는 호칭을 붙이자 들릴 듯 말 듯 가인의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요하지 않은 타이틀이에요. 그나저나, 오늘은 지난번 그 할아버지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제가 책임지고 틀니 해드리기로 했거든요.”
“그럼 할아버지 모시고 합정동을 왔다 갔다 하시려고요?”
“아니요. 근처에 제 친구 치과가 있어서 당분간 신세 좀 지려고요.”
마침 식사를 마친 노인이 배식소를 나오자 가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저기, 시간 되실 때 연락 한번 주시겠어요?”
명함을 내미는 가인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 명함을 받아 든 재림이 뜻밖의 말을 했다.
“오늘 4시 이후로 시간 되는데, 저녁식사 어떠세요?”
“…….”
미처 생각지 못한 제안에 가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또다시 찾아온 혼란이었다. 그런 가인에게 밀당이나 계산은 필요 없었다.
다만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그녀가 내려놓았던 ‘살아갈 용기’였다.
“좋아요.”
*
귀가 후 드레스룸에 들어선 가인이 마구잡이로 옷을 꺼냈다. 12년 전 짧았던 결혼생활 이후 데이트가 처음인 탓이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을지…… 머리와 메이크업은 어떻게 하고 나가야 인상 깊을지…… 가인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이 혼란을 즐기는 중이었다. 전신 거울에 비친 상기된 얼굴이 이미 세상을 다 얻은 듯했으니까.
그때였다.
똑똑! 한껏 고조된 혼란을 깬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수현이었다.
“오늘 일요일 아닌가?”
차갑게 굳은 가인의 날 선 반응에 살짝 멈칫한 수현이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 앞에 섰다.
“지난번 말씀하셨던 배우 지경하에 대해 보고하라고 하셔서 들렸습니다.”
“내일 회사에서 보고해도 되는 걸 굳이 지금 하려는 이유가 뭐지?”
즉답을 피한 수현이 재빨리 사방을 살폈다.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옷가지들과 액세서리가 뭔가 중요한 약속을 앞둔 가운데 신경이 예민해진 듯했다.
눈치를 숨긴 수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초지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가인을 응시했다.
“최대한 빨리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가인의 하얀 원피스를 주워 든 수현이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런 보고 올리지 않기로 대표님이 정하셨는데요.”
“……아 참, 미안.”
가인이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공재림을 만날 생각에 잠시 망각했던 현실을 떠올리니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약속, 있으세요?”
조심스레 물어오는 수현에 살짝 망설이던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흥미로운 사람을 만났어. 그래서 좀 알아보려고.”
“치과의사 공재림 선생님 말씀입니까?”
“응. 처음엔 속이 거북해 속이 울렁거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수행비서인 수현 앞에서 가인은 꽤 솔직했다. 속내를 보여도 괜찮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직접 알아보시려고요?”
“그럴 생각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사람은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거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수현은 한마디로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수현이 아는 바, 이가인은 그 정도의 남자에 넘어갈 성향이 아니었으니까.
소위 난다 긴다 하는 맞선 자리가 들어왔을 때도 가인은 셈이 복잡하다며 거절했었다. 하물며 행사나 연말 파티에서조차 누구에게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분야별 잘 나가는 의사들도 줄을 이었었다. 치과의사 공재림보다 인물도, 스펙도, 배경도 월등한 능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두를 마다한 이가인이 별안간 평범한 페이닥터 따위에 관심을 보인다고……?
“혼란.”
“네? 혼란……이요?”
“응.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 글쎄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니까.”
“……많이 좋아하시네요.”
의미 모를 미소를 보이는 가인에 수현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
레갈로(regalo) 레스토랑
가인이 들어섰을 때 재림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노인의 잇몸치료가 까다로웠는지 살짝 피곤한 기색이 보이기도 했다.
가인이 다가가자 해바라기 같은 웃음과 함께 일어난 재림이 그녀를 맞이했다.
“잊지 않고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한 약속을 잊을 리가요.”
반갑게 맞아주는 재림에 가인의 마음이 일렁였다. 그의 웃음이 형식적이지 않은 탓이었다.
“여기, 대표님 단골식당인가요?”
“네. 평창동 토박이라서 웬만한 맛집이나 카페는 다 알고 있어요.”
“아, 다행이다. 그럼 추천해 주실래요? 실은 지금 무척 배가 고프거든요.”
진심 어린 재림의 말투에 가인이 웃었다.
“그럴게요.”
잠시 후, 가인이 추천한 텐더로인 안심 스테이크와 이탈리아식 화덕 피자를 깔끔하게 먹어치운 재림이 배가 부른 듯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운전을 위해 아쉽지만 와인은 피했다.
식사를 마치자 디저트로 코끝을 자극하는 은은한 커피와 유자차가 놓였다.
“여기 진짜 맛있는데요?! 대표님 미식가시네요.”
“선생님 취향을 잘 몰라서 가장 호불호 없는 요리로 주문했어요.”
“보시다시피 안 가리는 편인데 퓨전음식은 일부러 찾아 먹진 않아요.”
식사 내내 재림은 가인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뭔가 계산을 하고 그녀를 만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 눈에도 호리호리한 마른 체형에 드러난 쇄골 뼈,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턱 선에 걸린 그녀의 단발머리가 은은한 식당 조명에 찰랑거렸다.
거기다 악의 없는 눈매, 야무진 콧방울, 이따금씩 드러나는 건치, 유난히 하얀 피부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형상이었다.
이가인이 전 미래유통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재림은 수많은 사연이 담긴 그녀의 눈빛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가인이 명함을 건넨 순간에도 재림은 딱히 설레지 않았다. 그저 대표를 몰라봤던 실수도 있고 하니 식사대접을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
식사 내내 거의 표정이 없다시피 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인간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번 가인과 처음 눈이 마주친 재림이 그녀에게서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