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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Dec 17. 2024

11화. 평창동 살인사건 : 살인마의 표식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수현이 운전 중인 가운데 동승석에 탄 영원이 뒷좌석에 앉은 가인을 돌아봤다.



“아까 그 사람, 어때?”

“누구?”

“누구긴, 치과의사 공재림말이야.”

“……그냥 젠틀하고 성실한 것 같더라.”



무관심한 듯 시큰둥한 가인에 영원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서른일곱. 집은 상암동이고 미혼에 애인은 없대.”



공재림 신상을 읊은 영원이 앞을 돌아봤다. 뭔가를 예감한 듯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사이에 참 빨리도 친해졌다. 하영원답네.”



가인이 애써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피했다. 치과의사와 엮으려는 영원의 의도를 이미 파악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순간 뭔가 떠올랐는지 영원이 전방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참! 며칠 전 대형마트 옆 다원파크 2단지에서 살인사건 난 거 알아?”

“뉴스에서 봤어.”

“후우, 벌써 두 번째야. 이거 진짜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거 아니야?”



살짝 떨리는 영원의 음성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2개월 간격으로 발생한 두 건의 평창동 살인사건 범인이 아직 검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는 6살 강모 양과 연구원이자 아내와 두 아이를 둔 40대 중반의 고모 씨였다.


8월 초, 동네 바자회가 한창이던 누리아파트 단지 뒤쪽 외진 틈 사이에서 강 양이 숨진 채 발견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실종 후 약 2시간 만에 발견된 아이는 비좁은 틈에 반듯하게 누워있었고 몸에는 마치 날카로운 송곳이 지나간 듯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범인의 엽기적인 행각은 따로 있었다. 아이의 굳게 닫힌 입술과 안구가 적출된 감긴 눈꺼풀 위로 삐뚤빼뚤 오색 바느질을 해놓은 거였다.


게다가 아이의 쇄골과 가슴 사이에는 마치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낙인을 찍듯 ‘peace’라는 영문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잔인한 살인행각과 어울리지 않는 범인만의 ‘평화’였다.


표면상 사인은 알 수 없는 독극물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아이 목덜미에 파랗게 멍든 주삿바늘 자국도 발견됐다. 다만 부검 당시 아이 몸에 남아있는 독성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부검의는 빠르게 흡수된 독성이 순식간에 모든 장기와 혈관을 파괴하며 마치 급속 냉각되듯 굳혀버린 탓에 외형상 흘러나온 혈액은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미상의 독극물은 수분 내 자가 희석되는 새로운 화합물로 초단위의 살생이 가능한 신종 독극물이라고 전했다.


수사결과, 경찰은 아이에게서 성폭행 및 폭행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더불어 저항흔도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 와중에 안타까운 사실은 사건 당시 cctv 카메라가 바자회 천막에 가려진 탓에 가족과 떨어진 아이의 동선을 파악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난 10월 중순,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평창동 주택가와는 조금 떨어진 대로변 대형마트 옆 다원파크 공원이었다.


살해된 고 씨는 최근 불어난 뱃살을 빼겠다며 저녁식사 후 밤 9시쯤 매일 산책을 다녀왔다는 가족의 증언이 있었으며 사건 당일,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복차림에 핸드폰만 챙겨 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폰 전원이 꺼진 채 두 시간이 넘도록 고 씨가 귀가하지 않자 가족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곧, 공원 내 대형 쓰레기통 안에서 거꾸로 박혀 숨져있는 고 씨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숨진 고 씨의 몸에서 별다른 폭행의 흔적이나 상흔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원이 꺼진 핸드폰 또한 운동복 주머니에 있었다고 전해졌다.


이에 대해 경찰은 원한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결과 고 씨는 채무나 도박, 불륜 등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으며 회사 내 평판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두 달 간격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연쇄살인사건을 우려하는 데는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숨진 고 씨의 사인 또한 알 수 없는 독극물에 의한 심장마비였기 때문이었다. 목덜미 부근 시퍼런 주삿바늘 자국마저 강 양과 일치했다. 뿐만 아니라 고 씨 또한 안구가 적출된 채 감긴 눈꺼풀과 입술 위로 오색 바느질이 되어있었고 송곳 낙서와 함께 쇄골 아래 ‘peace’라는 낙인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과거 해외에서 이와 유사한 살인사건이 있었기에 경찰은 모방범죄를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망했음에도 안구를 적출하고 눈과 입을 봉합했다는 것,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와 ‘평화’라는 표식을 남긴 것은 범인의 특정 심리가 내재된 사건이라는 프로파일러 의견에 경찰은 새롭게 수사방향을 틀었다.


범인은 대상을 살해한 후 숨는 것이 아닌, 시신을 훼손해 되레 자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었다. 언론 또한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강력사건으로 인지하며 연일 보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경찰은 피해자들과 관련한 접점을 찾으려 했으나 평창동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 어떤 연관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가며 수사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되지 못한 가운데 평창동 주민들에게는 점차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평창동 토박이인 가인을 비롯해 영원과 수현이 안심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다들 조심해. 밤늦게 나가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날벼락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가인이 영원과 수현을 챙기자 영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가인을 돌아봤다.



“너야말로. 너 혼자 사는 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진짜 걱정이다.”

“내가 그 집에 산 게 몇 년인데, 낙엽 내려앉는 소리도 구분할 정도야.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다들 일찍 다녀!”



아무 문제없다는 듯 가인이 되레 영원과 수현을 염려했다. 보안이 철저한 자택과 달리 외진 곳에 위치한 원룸이 두 사람의 거주지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꽃집 앞에서 영원이 내리고 곧 가인의 저택 앞에 차량이 멈춰 섰다.



“내리지 말고 그냥 가. 오늘 수고했어.”



백을 챙긴 가인이 차문을 연 찰나였다.



“제가 더 알아볼까요?”



운전대를 잡은 이후 처음으로 수현이 입을 열었다.



“뭘? 아, 치과의사?”

“네.”

“아니, 알아보지 마. 내일 아침에 보자!”



차에서 내린 가인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짓말.”



선하지 못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린 수현이 대문을 노려보다 시동을 걸었다.



**



재킷을 벗을 생각도 없이 가인이 털썩 거실 소파에 앉았다.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궁전 같이 넓은 이 저택에 홀로 들어설 때면 가인은 늘 공허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 그녀는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치는 묘한 감정이 집주인 가인에게 그 틈을 내주지 않은 건.


공재림.


그녀 인생 34년 만에 처음으로 선명히 각인된 이름이었다. 물론 그에게 호감이 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혼에다 애인이 없다는 말은 왜 그렇게 기뻤는지…… 가인은 어리둥절했다.



“혼란스럽네.”



소파에 몸을 기댄 가인이 눈을 감았다. 문득 12년 전 과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녀는 과거 결혼을 했었다. 비록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22살, 나름 순수했던 대학교 3학년 캐나다 유학시절…… 호숫가 공원을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한 남자가 그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는 느지막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34살의 한국인이었다. 당시 흰털이 수북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중이던 남자는 강아지에 관심을 보인 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데 머나먼 타국 생활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얼마 못 가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연인이 된 그들이 작은 교회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불과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만 양가 부모님에게는 결혼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 반듯한 결혼식과 함께 혼인신고를 하는 것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던 까닭이었다.


가인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에 무한한 배려와 경청하는 자세를 죽을 때까지 보여주겠다는 남자의 맹세.


그러나 그 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후 채 3개월이 지나기도 전, 자상하고 따뜻했던 그의 성품은 몰라볼 만큼 차갑게 바뀌었고 무한한 배려와 경청하는 자세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 대화 단절로 이어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남편에 가인은 사기결혼이라는 결론과 함께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남자는 오랜 타국생활로 심심했을 뿐, 가인을 사랑한 게 아니라는 잔인한 말을 남긴 채 집을 나가버렸다.


그저 돈이 많아 보여 한번 가져보고 싶었다는 조롱 섞인 비웃음과 함께.


그렇게 3개월도 채우지 못한 가인의 결혼생활은 악몽에서 깨어나며 처참히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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