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 Dec 15. 2024

10화. 혼란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일요일.


일찍 교회예배를 마친 가인이 차를 몰아 서둘러 종로 3가로 향했다.


미리 설치해 놓은 간이진료소에서 노숙자들의 무료 치과검진이 시작된 가운데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의료봉사를 자원한 합정동 새빛치과는 총 6명의 닥터와 17명의 직원이 재직하는 꽤 규모 있는 치과였다. 그 가운데 오늘은 4명의 닥터와 5명의 직원들이 검진을 돕기로 했다.


가인은 새빛치과 대표원장과 안면을 터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연계 병원이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일을 추진함에 있어 과정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가인의 차량이 진료소 근처 주차장에 들어섰다.


언뜻 차창 너머 보이는 긴 줄이 그녀 눈에 띄었다. 치과검진은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던 터라 뭔가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나 가인에게 힘을 싣는 듯했다.


철컥! 주차를 마치자 차량을 보고 달려온 그녀의 비서 나수현이 차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응.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거지?”



차에서 내린 가인이 진료소를 바라보며 수현에게 물었다.



“네. 선생님들이 시간 맞춰 도착하셔서 바로 시작했습니다.”

“대표원장님도 오셨어?”

“네. 진료소 가장 오른쪽에 계신 분입니다. 56세 김기준 원장님으로 삼성동에 거주 중이며 변호사 아내와 사고로 숨진 첫재 아들 제외, 대학생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사교적이며 골프와 낚시를 즐겨하신다고 합니다.”



수현이 신속하게 치과 원장 김기준의 신상을 보고했다. 일전에 가인이 지나가는 말로 “새빛치과 원장은 어떤 사람일까?”라고 내뱉은 이후였다.


가인이 복지재단을 설립하고 3년 뒤, 당시 화학을 전공하던 25살 대학생 수현은 그녀의 수행비서로 채용되었다.


4살 무렵 양친이 양육을 포기해 보육원으로 보내진 수현은 퇴소 후 22살이 될 때까지 고시원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다 느지막이 대학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그런 수현에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후원해 준 곳이 바로 가인이 설립한 노아복지재단이었다.


수현의 천성적 성실함과 명석한 두뇌,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가인이 먼저 수현에게 입시를 권유했고 모든 지원을 받은 가운데 수현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 후 수현이 3학년을 마치며 조기졸업을 하자 가인은 그녀를 수행비서로 채용했고 비서가 된 수현은 가인의 모든 일정을 관리, 통괄하며 통상적인 비서 업무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가인의 모든 외부 일정에는 늘 수현이 동행했고 각종 운동을 섭렵한 유단자로서 수현은 그녀를 보호했다. 이렇다 할 문화생활이나 인간관계없이 근무 시간 외에 묵묵히 운동에만 전념하는 수현의 단편적인 생활에 가인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무심코 뱉은 가인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구두보고를 할 만큼 섬세한 수현의 충심 때문이었다. 가인은 그런 수현에게 고마우면서도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보고를 들은 가인이 곧장 진료소로 향했다. 목적대로 치과원장 김기준과 안면을 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처 원장을 만나보기도 전, 가인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진료소 천막 밖으로 내리쬐는 10월의 가을햇살이 분주한 현장을 차분히 밝히던 순간이었다.


하얀 반가운을 걸친 한 남자가 도망치듯 나가려는 고령의 노숙자를 붙잡았다.





“어르신! 그렇게 가시면 치료 못 받으세요!”

“됐어! 밥 넘길 만큼만 고쳐달라고 했지, 내가 언제 틀니 한다고 했어?!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를 다 뽑으라는 건데?!”

“치통도 심하신 데다 지금 남아있는 치아로는 얼마 못 가 다 빠집니다. 잇몸 뼈가 약해서 임플란트도 힘드세요. 틀니로 바꾸셔야 음식을 씹고 소화를 시키죠. 어르신 지금 위장장애도 있으시잖아요.”



증상을 꿰뚫어 보는 남자에 뜨끔했는지 멈칫한 노인이 헛기침을 하자 듬성듬성 남아있는 너덧 개의 누런 치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인은 여전히 남자에게 적대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썩은 치아마저 모두 빼앗길까 입을 꾹 다문 모양새가 그를 믿지 않는 듯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남자가 미소를 띠며 노인에게 다가왔다.



“어르신 틀니는 제가 책임지고 해 드릴게요. 돈 안 내셔도 되니까 저 믿고 치료받으세요.”

“정말……이야? 공짜라고?”



못 믿겠다는 듯 반신반의하는 노인에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제 이름 걸고 약속드릴게요. 어르신 오늘 저 만난 거, 복 받으신 겁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매주 일요일마다 제가 어르신 뵈러 올 거거든요. 치료 끝날 때까지.”



너스레를 떨며 의연하기만 한 남자에 뭔가를 느꼈는지 소란을 피우던 노인이 별안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덕지덕지 때가 묻은 데다 산발된 머리에 발음도 어눌한, 그야말로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꽉 잡은 노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음 주 일요일 여기서 식사하시죠?”



남자가 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마치실 때쯤 제가 모시러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마세요.”

“…….”



노인은 침묵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걸어 나가는가 싶더니 저만치 벤치 끝에 걸터앉고는 곧 소나기처럼 굵은 눈물방울을 사정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마스크 위로 선한 눈웃음을 보이며 돌아섰다. 가인과 처음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자원봉사자세요?”



마주 선 가인에게 먼저 말을 건 남자, 공재림이 가을햇살을 등지고 웃고 있었다.


하얀 운동화에 남색 슬랙스, 스카이블루 계열의 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모습에 바람에 휘날리는 건강한 머릿결, 마스크를 내린 배열이 잘된 이목구비가 한눈에도 호감형이었다.


다만 물어오는 모양새가 가인을 잘 모르는 듯했다.



“아, 네.”

“그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 이요?”



가인이 되묻자 살짝 눈치를 살핀 재림이 지갑을 꺼내 들었다.



“저기 벤치에 앉아계신 저 할아버지가 치아가 없어 소화를 잘 못 시키시거든요. 그래서 점심에 죽을 드셔야 할 거 같은데, 제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요. 죄송하지만 이 카드로 소고기죽 두 그릇만 사다주시겠어요?”





몹시 미안한 얼굴로 카드를 내미는 재림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가인이 손을 뻗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재림의 손에서 카드를 낚아챘다. 수현이었다.



“이분은 저희 복지재단 대.”

“아니! 됐어요. 제가 사다 드릴게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커피나 디저트 아무거나 사 드세요. 꼭이요! 그럼 전 이만.”



서둘러 진료소로 뛰어간 재림이 다시 검진을 시작하자 넋을 잃고 서있던 가인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마치 따가운 햇살에 초점을 잃은 듯 그녀는 멍한 얼굴이었다. 수현이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기도 했다.



“대표님.”

“…….”

“대표님!”

“어?”



수현이 팔을 건드리자 초점을 잃었던 가인의 눈이 수현을 알아봤다.



“준비실에 앉아계세요. 죽은 제가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 카드 이리 줘.”

“네? 그게 무슨…….”

“내가 사 오겠다고 했으니까 약속 지켜야지.”



낚아채듯 가인이 카드를 가져가자 당황한 수현이 멈칫했다. 누구보다 가인을 잘 알고 있던 수현으로서는 지금 그녀의 행동이 일탈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본래의 이가인이라면 절대 카드를 받지 않았을 터였다. 낯선 사람과는 애초에 말을 섞지 않는 경계인이었으니.


그런 천하의 이가인이 낯선 남자의 카드를 받았고 마치 첫 데이트를 시작한 연인처럼 설레는 발걸음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뭐지?’


처음 보는 가인의 낯선 모습에 수현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



포장된 소고기죽 두 그릇이 담긴 봉투를 든 가인이 가게를 나와 빠른 걸음을 옮겼다.


제법 무게가 있었으나 이 순간 가인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재림.


남자가 입고 있던 가운에 새겨진 이름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인은 꼼짝할 수 없었다. 합정동 새빛치과 페이닥터라는 것과 공재림이라는 이름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는 낯선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가인은 난생처음 인간에게서 후광이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청초한 가을햇살에 속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본 건 분명 후광이었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인은 눈빛이 흔들렸고 그가 웃음을 보였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지독한 음지 속, 쳇바퀴 같았던 그녀의 일상에 드디어 혼란이 찾아온 거였다.



**



가인이 도착하자 웅성거리는 긴 줄이 보였다. 곧 배식이 시작되려는 모양새였다.


준비실로 들어선 가인의 시야에 국자를 들고 서있는 영원이 보였다. 그 옆으로 위생모와 마스크를 쓴 공재림이 주걱을 쥔 채 배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인아!”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참! 여기 인사해.”



그새 안면을 튼 건지 영원이 가인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 의료봉사 오신 새빛치과 공재림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아까 뵀었죠?!”



가인을 알아본 재림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천진난만한 눈웃음이 마치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아이 같았다.



“네. 부탁하신 소고기 죽은 벤치 할아버지께 따로 챙겨달라고 했어요.”



오고 가는 심상치 않은 대화에 두 눈이 커진 영원이 끼어들었다.



“뭐야, 두 사람 벌써 구면인 거야?”

“어? 어. 아까 밖에서 뭘 좀 부탁하셨어.”

“죄송해요. 바쁘신 와중에 번거롭게 해 드려서.”

“아니에요. 저희가 더 면밀히 챙겼어야 했는데 오히려 감사하죠.”



두 사람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영원이 곧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가인을 응시했다.


수현과 마찬가지로 낯선 가인을 목격한 탓이었다.



“근데 성함이……. 방금 들으신 대로 저는 공재림입니다.”

“이가인이에요.”

“아~ 이가인 씨. 아까 감사했어요.”



다시 한번 인사를 전한 재림의 시선이 순간 먼 곳을 응시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움직이며 배식이 시작된 거였다.


서둘러 소독을 마치고 위생모와 마스크를 착용한 가인도 자리를 옮겨 배식을 시작했다.


식판 위에 두부조림을 올리는 가인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따끈따끈하게 담긴 수북한 흰쌀밥에 유독 그녀의 시선이 쏠리는 중이었다.


쌀밥을 배식하는 공재림 때문이었다. 물론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쪽에서 이가인을 지켜보고 있던 무표정한 나수현을 제외하고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