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가인은 학업을 위해 다시 캐나다로 출국했고 2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몇 개월 뒤 귀국했다.
10여 년 만에 다시 딸과 함께 살게 된 이태진 부부는 뜻깊은 해를 기념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무려 10년 만의 첫 가족여행이었다. 그러나 뜻깊은 추억을 쌓을 줄만 알았던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이태진이 아내 도미연과 함께 탑승한 차량이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작동되지 않는 브레이크와 통제할 수 없는 속력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만 해안도로 옆 돌담을 뚫고 바닷속으로 돌진한 거였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차량들의 신고로 신속한 구조가 이뤄졌지만 안타깝게도 이태진과 도미연은 침수된 차량 안에서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
그나마 한 시간 후 부모님과 만나기로 했던 가인은 별장에 머물고 있던 탓에 간신히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수사결과 사고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발진으로 밝혀졌다. 또한 블랙박스 분석을 통해 경찰은 사고 당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자 이태진이 다른 차량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돌담을 향해 핸들을 돌린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고 승용차는 이태진 일가 소유 차량으로 직전까지 주행에 문제가 없었으며 기타 기계 조작이나 훼손 등 의도적인 사고 유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법정까지 갔던 재판은 결국 운전자 과실로 인한 부주의로 판결이 났다.
딱히 결함이 없었다는 국과수의 차량 감식결과와 더불어 법규상 급발진 원인을 사고 운전자 측이 증명해 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스템으로 인한 증거부족이 그 이유였다.
판결 이후의 후폭풍은 그보다 더 거세게 몰아쳐왔다.
이강수 회장의 외아들이었던 이태진 사장의 사망은 곧 미래유통 후계자의 부재를 불러왔고 유일한 상속녀가 된 가인 주변으로 금세 돈 냄새를 맡은 일가친척 및 지인들이 꼬여든 거였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사내 임원자리와 지분을 요구했고 정략적으로 계산된 선 자리를 끊임없이 들이밀며 가인에게 결혼을 재촉했다.
그러자 감당하기 버거웠던 슬픔을 딛고 일어선 가인은 여려 보이기만 했던 얼굴과 달리 매우 단호하게 움직였다.
사고 1년 뒤 병중에 누워있던 조부 이강수 회장이 향년 82세로 별세하자 그로부터 6개월 후, 가인은 합병 대신 과감히 회사를 매각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강수 회장과 아버지 이태진 사장이 어렵게 일궈놓은 회사였던 만큼, 가인은 미래유통을 더 굵직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킬만한 기업을 선별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회사를 넘겼다.
어차피 자신이 앉아있어 봐야 기업의 발전보다는 지분을 차지해 회사를 삼키려는 늑대들의 소굴로 얼룩질 게 뻔했으니까.
‘미래유통 매각’이라는 속보가 뜨자 그 파장은 적지 않았다.
당시 불과 25살이었던 미래유통 손녀의 결단에 소위 언론과 여론은 그녀를 향해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족함 없이 온실 속에서만 자란 철부지 상속녀가 인생을 쉽게 살고자 매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는 이른바 질책적 여론이었다.
일각에서는 18년 전 실종된 그녀의 남동생 이서인이 나타날 경우 유산을 나누어야 한다며 가인이 재산을 모두 탕진하지 못하도록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그러나 가인은 주제넘은 시끄러운 참견에 흔들리지 않았다.
과거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만큼 가깝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게 해준 나쁜 어른들을 경험한 이후, 가인은 웬만해선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거대한 사자도 흉측한 몰골로 겁을 주는 귀신도 아닌, 검은 속내를 숨긴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진작 경험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은 가인은 이후 누구와도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았다. 가급적 사람을 멀리했고 간혹 처절한 외로움이 지독한 감기처럼 찾아와도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꿋꿋해야 한다며 가인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그쳤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캐나다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제외한 모든 시간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사라지고 없는 지금의 현실을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혼자가 편해 선택한 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 가인은 그녀가 원하지 않은 세계에 밀쳐지듯 갇혀버린 거였다.
그렇게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가인은 살점이 타들어가는 혹독한 시간들을 오로지 혼자 견뎌야 했다.
***
가인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회사를 매각한 금액의 일부로 복지재단을 설립한 이후였다.
당시 그녀 나이 28세. 굴곡진 인생을 다 거쳤다 하기에는 아직 이른 청춘이었다. 하지만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일들로 가족을 모두 잃은 가인에게 더 이상 청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지…… 가인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그 결과, 노아복지재단이 탄생했다.
재단은 결코 혼자 일구어 나갈 수 없는 조직이었기에 가인은 분야별 직원채용과 더불어 새로운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운 동갑내기 직원 하영원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비로소 닫혀있던 마음을 열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데다 이미 다른 재단에서 경력을 쌓았던 영원이었기에 가인에게 있어 헌신적인 그녀는 둘도 없는 조력자이자 가인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설립된 노아복지재단은 미래유통의 유일한 상속녀 이가인이 대표라는 타이틀과 함께 점차 그 규모를 키워갔다.
***
6년 후.
가인의 나이 어느덧 34살이 된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똑똑! 대표실 문이 열리고 영원이 들어섰다.
재단총괄실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노련한 실력자이자 가인의 유일한 친구였다.
“대표님,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갑자기 제안서가 들어왔습니다.”
보고와 동시에 영원이 A4지 한 장이 꽂힌 파일을 가인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파일을 받아 든 가인이 제안서를 들여다봤다.
아이돌 걸그룹 출신 배우 지경하가 재단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소속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대신 전해온 거였다.
미간을 찡그린 가인이 툭! 하고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왜 하필 우리 복지재단을 이용하려는 건데요?”
영원을 올려다보는 가인의 음성에 미세하게 날이 섰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 지경하는 얼마 전까지 각종 스캔들과 함께 음주 후 행인과의 폭행시비로 구설수에 올랐던 연예인이기 때문이었다.
뉴스를 제외하고는 미디어와 거리가 먼 가인이 그녀를 알고 있는 것 또한 그만큼 뉴스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이기에 가능했다.
걸그룹 시절 요정 같은 외모와 시선을 사로잡는 춤으로 센터를 꿰찼던 지경하는 급상승한 인기로 단번에 드라마 주인공까지 차지했던, 소위 잘 나가던 연예인이었다. 지금이야 말 그대로 과거형이 되었고 대중의 부러움을 샀던 요정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간 회사의 철저한 이미지 관리로 감춰왔던 본체가 해를 거듭할수록 수면 위로 드러나자 지경하는 캐스팅 됐던 드라마를 결국 하차하기에 이르렀고 간간이 찍었던 광고도 내려간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추락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쇄신하고자 고안해 낸 것이 봉사활동이었다.
“그게…… 아마도 대표님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보니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살짝 머뭇거리던 영원이 불 보듯 뻔한 제안서의 의도를 숨김없이 전했다.
“전 그것보다 아이들을 이용해서 이미지 세탁을 하려는 그 속내가 너무 역겨운데요.”
다소 직설적인 가인에 공감한다는 듯 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하영원 앞에서만 내뱉을 수 있는 가인의 거친 속내였다.
곧, 단호한 결정이 이어졌다.
“우리는 기사 같은 거 안 내보낸다고 다른 곳 알아보라고 하세요.”
“그게…… 거절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왜죠?”
“1년 전쯤 지경하 씨가 저희 재단에 3천만 원을 기부했거든요.”
“그게 이 제안과 상관이 있나요?”
“그때 지경하 씨가 보육원 아이들과 사진 찍고 기사 내보내겠다는 걸 다음에 해주겠다고 거절했어요. 당시 폭우로 보육원이 난리도 아니었던 때라 정신없이 일 처리를 하다 보니 그만……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실장님 잘못 아니에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책하는 영원에 가인이 다시 파일을 집어 들었다.
“뭐, 진심으로 자숙하는 양심일 수도 있으니까…… 진행하시죠.”
“네? 그럼, 대표님도 참석하시는 걸로 전달할까요?”
“네. 지경하 씨가 원하지 않아도 가볼 참이에요. 궁금해졌거든요. 그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난 가인이 영원에게 파일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합정동 한 치과에서 무료로 노숙자 치아검진을 해주겠다며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에 얼굴이 밝아진 영원이 한껏 텐션을 높여 보고했다.
“그래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일요일 오전에 검진하고 오후에는 배식까지 하고 가시겠다고, 꽤 적극적이어서 통화했던 민희 씨가 더 놀라더라고요.”
“잘됐네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그럼 홍보와 설치에 문제없도록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이길래 봉사에 이렇게 적극적이지?’
옷걸이에 걸린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은 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료검진을 제안하는 병원은 종종 있었지만 휴일에 자발적으로 배식까지 자원하는 단체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퇴근시간이네. 우리 저녁 뭐 먹을까?”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벽시계 바늘이 6시를 넘기자 가인이 먼저 직함을 내려놓았다.
서로 약속이 없을 때면 으레 저녁을 함께 먹어왔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실종 남동생에 사고로 부모까지 잃은 가인을 위해 신정동에서 평창동으로 거주지까지 옮긴 영원은 세상 속 혼자 남겨진 가인에게 유일한 숨통이자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