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디저트 카페.
창가에 마주 앉은 가인과 재림을 사이에 두고 디카페인 커피와 하얀 접시에 담긴 오색 마카롱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하지만 가인으로서는 마냥 여유를 부리기에 촉박한 시간이었다.
은은한 커피 향에 차를 음미한 가인이 곧,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비즈니스 관계와 친밀한 관계를 대할 때 어떻게 구별하세요?”
“일단 대화 자체가 다르죠. 공적인 대화와 사적인 대화.”
당연하다는 듯 재림이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혼자 계실 때는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세요?”
“뭐, 별 건 없습니다.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가끔 친구들도 만나고요.”
“마지막 연애는 언제 하셨어요?”
순간, 별생각 없이 마카롱을 입으로 가져가던 재림의 손이 멈췄다.
“그건 사적인 질문이라 대답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그 말씀은 저는 비즈니스 관계라는 거네요. 밥친구가 아니라.”
다소 실망한 듯한 가인에 마카롱을 내려놓은 재림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가인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차분하고 지적인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 만만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또한 그도 짐작하는 바였다.
이가인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상속받은 유산에 관한 이슈는 한동안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을 만큼 시끄러웠으니까. 여전히 간간이 기사가 올라올 때면 어김없이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 참견려들이 들끓고 있는 실정이었다.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대표님과 친구 할 생각, 없습니다. 성격상 제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나서는 타입이라 드렸던 말씀인데 제가 대표님께 오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한 것 같네요.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겠습니다.”
단호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인 재림 뒤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노숙자 할아버지와 거리를 떠돌던 강아지 그리고 그날의 저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그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었다는 거네요.”
불쾌하다는 뉘앙스가 풀풀 풍기는 가인의 결론에 재림이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아, 뭔가 크게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제 뜻은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두 가지만 더 묻고 일어날게요.”
재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가인이 곧장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세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제 능력과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죠.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끝을 흐린 재림이 자신을 향한 가인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했다. 그녀에게 이런 설명을 한다는 게 다소 내키지 않는 모양새였다.
“저를 희생하죠.”
“희생, 이요?”
“네. 소중하다는 건, 제게 귀한 사람이란 의미거든요. 그 사람이 행복해야 제가 행복하니까요.”
“…….”
생각이 필요한 답변이었는지 가인은 잠시 말이 없었고 재림은 그런 가인을 방해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저를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네. 하지만 그건 결코 대표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저와 맞지 않을 뿐입니다. 아마 그건 대표님께서 더 잘 아실 거예요.”
칼 같은 재림의 대답에 살짝 얼굴이 굳었던 가인이 곧 의미 모를 미소를 보였다.
“오늘 제 질문들이 제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드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생님은 거절하셨고요.”
고민의 여지없이 단호히 선을 긋는 재림에 가인은 조금 난감했다.
그의 철벽으로 호감도가 낮아졌거나 혼란이 정리되었더라면 되레 마음이 편했을 테니까.
그런데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가인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오늘 이후 더 이상 우연을 가장한 만남도 어렵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숙제로 다가왔다. 치료를 마친 노숙자의 경과 및 진료를 재림의 치대 동기가 봐주기로 한 거였다.
즉, 공재림은 이제 종로에 올 이유가 없어졌다.
“대표님도 저에 대한 호기심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셨을 겁니다. 그러니 거절이라는 표현보다는 마음을 확인했다는 정도가 더 적절하겠네요.”
“말씀을 잘하시네요.”
“대표님을 따라가진 못하죠.”
노골적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재림이 얼마 남지 않은 미지근한 커피를 비웠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가방을 챙긴 가인이 먼저 일어났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마카롱도 맛있었고요.”
남은 마카롱 두 개를 집어든 재림이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딱히 미안하지도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 그의 얼굴이 가인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잠시 후, 카페 문을 열고 나온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재림이 먼저 제안했다. 약속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했지만 예의를 갖춰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에요. 바쁜 시간 쪼개 주신 걸로 충분해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음이 놓인 듯 재림이 미련 없이 돌아선 찰나였다.
“공재림 선생님!”
“네?”
“다음에 혹시라도 마주치면, 그때는 대표라는 호칭 대신 제 이름을 불러주시겠어요?”
“네……? 아, 네. 그럴게요.”
가볍게 눈웃음을 보인 재림이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가인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희생을 한다…….”
**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 재림이 차량에 올라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종로야.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상황은 어때?”
-“쉽진 않아. 그래도 어떻게든 매듭지어야지.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되도록 빨리 갈 게.”
통화를 마친 재림이 시동을 걸었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차디찬 그의 얼굴이 룸미러에 비쳤다.
***
일찍 출근한 가인의 얼굴은 밝았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부어오른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수현에게 스치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인 것을 제외하고는.
한편 영원은 남자친구 안도영의 귀국 일에 맞춰 생필품을 준비하느라 여전히 정신없는 모양새였다. 정확한 해외근무 일정이 나오지 않아 일단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하고 출국했던 상황이었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귀국은 영원을 바쁘게 만들었다.
물론 도영에게도 가족이 있었지만 사고로 거동이 불편한 노모가 서울과 철원을 오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업무에 다소 소홀할 만큼 정신없는 영원에 가인이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한 이유였다.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리긴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공재림과 어떻게 인연을 만들어야 할지, 방법을 생각하느라 가인도 정신없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월요일은 가인과 영원 그리고 수현에게 각기 다른 인생의 짐을 안겨주고 있었다.
***
금요일.
영원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1년 간 해외근무로 떨어져 있던 남자친구 안도영이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보이네요.”
업무보고 차 대표실에 들른 영원에게 가인이 말했다.
“네! 아름다운 금요일입니다.”
“아름다운 금요일이라…… 그 느낌 저도 느껴보고 싶네요. 다음 주 일정은 어떻게 되죠?”
업무모드로 들어선 가인에 영원은 기업과 단체로부터 받은 후원금과 함께 무료배식, 보육원, 노숙자 쉼터 등의 행사일정 및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설명했다.
“잘됐네요. 참! 보육원 난방시설 교체 건과 노숙자 쉼터 보수공사는 제 사비로 하죠.”
“정말이세요?”
마치 눈앞에서 천사를 본 양, 두 손을 모은 영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곧 겨울이라 후원금은 난방비와 겨울용품 구입만으로도 빠듯할 것 같아요. 연탄구입까지 충당해야 하니까요.”
“역시, 어느 재단 대표님이 이렇게 꼼꼼하게 체크하시겠어요!”
“비교는 사양입니다. 업무는 끝났고, 이제 잠깐 사적인 얘기 좀 하죠.”
책상에서 일어난 가인이 소파로 이동하자 영원이 의아한 얼굴로 뒤따랐다.
“남자친구는 귀국 잘했고?”
“아, 난 또 뭐라고…… 잘 도착했어. 좀 말랐더라고.”
“네가 다시 찌우게 하면 되지. 아주 귀국한 거야?”
“귀국 하루 차라 그런 건 안 물어봤어. 차차 물어봐야지. 아참!”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영이가 너 소개해 달래.”
“갑자기?”
가인이 되물었다. 일 년 만에 만난 연인과 벌써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게 뜻밖이었다.
“내가 안도영 없는 동안 이가인이 나랑 놀아줬다니까 본인이 꼭 인사해야 한다나 뭐라나. 웃기지?”
“그만큼 너에 대한 마음이 큰 거지. 인사한다는 걸 보니.”
“그건 핑계고, 이젠 괜찮겠다 싶은 것 같아.”
갑작스럽긴 했지만 늘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던 찰나 가인은 잘됐다 싶은 마음이었다.
불현듯 뭔가 떠오른 가인의 두 눈이 커지기 전까지는.
“너 혹시…… 프러포즈받았니?”
“…….”
영원은 말이 없었다. 단지 감출 수 없는 그녀의 입꼬리가 대답을 대신했을 뿐.
눈치 빠른 가인이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웃음을 보였다. 귀국과 동시에 안도영이 엄청난 선물을 들고 온 셈이었다.
입버릇처럼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영원의 소망을 실현시켜 줄…….
똑똑!
때마침 노크와 함께 수현이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아니에요. 저도 막 나갈 참이었어요. 그럼 이만.”
무표정한 수현에 벌떡 일어난 영원이 간단한 목례와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 영원에 수현은 딱히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수현은 조금 전,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정색하며 일부러 노크를 했다. 대표실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라는 생각에서였다.
영원이 나가자 가인이 다시 책상에 앉았다. 뭔가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지난번 무료 노숙자 치과검진 해주셨던 새빛치과 원장님께서 대표님 제안에 응하셨습니다.”
반가운 보고에 화색이 돈 가인이 수현을 올려다봤다.
“저녁에 시간이 된다고 하시던가요?”
“네. 그런데 금요일을 말씀하셔서요.”
“다음 주 금요일? 그날은 안 된다는 거 수현 씨도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른 날로 말씀드렸더니 그날 오전 진료만 하신다며 점식식사를 제안하셨습니다.”
“…….”
턱을 괸 가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날이 날이었던 만큼 조금 난처한 모양새였다.
“그럼 금요일 점심, 합정동 근처 한식당으로 예약 잡아주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수현의 얼굴은 가인과 달리 밝지 않았다.
“네. 괜찮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