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제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괜히 원장님을 곤란하게 해 드렸네요”
“무슨 그런 말씀을, 애써 여기까지 오셨는데 없는 시간도 빼야죠.”
기준이 호탕하게 웃었다. 초면에야 가인과 짧게 인사만 나눈 정도였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에 친근한 말투나 시원시원한 웃음이 어색한 장벽을 금세 허물게 했다.
테이블 위에 차가 놓이자 가인이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핸드크림 세트예요. 다른 건 거절하신다고 하셔서 약소하게나마 준비했습니다.”
“의료봉사에 뭘 바라고 한 게 아닌데 저희가 괜한 신경을 쓰게 해 드렸네요. 과분하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쇼핑백을 받아 든 기준이 마치 귀한 선물을 다루듯 옆자리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원장의 성품에 가인의 기대가 커진 순간이었다.
“무료검진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후원금까지 보내주셨다고 해서 직접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에 제가 조금 더 보탰을 뿐입니다. 아, 주신 선물은 직원들과 같이 잘 쓰겠습니다.”
인상답게 연신 호탕한 웃음을 보이면서도 겸손한 기준에 가인은 공재림에 대한 호감이 더해지는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꼈다.
“다음에 시간 되시면 꼭 식사대접도 해드릴게요.”
“이것만으로도 이미 배부른 걸요. 게다가 저희는 일일봉사라 복지재단 스케일에 비하면 견줄게 못 되죠.”
배려 넘치는 기준의 성품에 가인이 미소를 지었다.
“합정동에도 복지재단이 있는데 왜 굳이 저희 재단에 제안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재단과 연고가 없는 타지에서 의료봉사를 제안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근방에서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 선생이 추천을 하더라고요.”
“공 선생이라면, 공재림 선생님이요?”
반가운 이름이 등장하자 가인의 귀가 번쩍 뜨였다.
“네. 많은 재단이 잘 운영되고 있지만 특히 노아복지재단의 경우 기부액과 사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공 선생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만장일치로 채택됐습니다.”
“공 선생님이 저희 재단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긴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 번을 내색하지 않았던 재림의 비하인드에 가인은 반가움과 더불어 서운함을 느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함께 식사한 거리는 매우 가까웠지만 그가 둔 마음의 거리는 8차선 도로였던 셈이었다.
“뭐랄까…… 그 친구가 좀 특이해요. 인생 목표가 선행이라거나 정의구현은 아닌데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은 꼭 할애하는 친구예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 이게 그 친구 가치관이라…… 그래서 의료봉사 얘기가 나왔을 때도 적극적으로 찬성하더라고요.”
순간 뭔가 떠올랐는지 기준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공 선생이 유기견을 발견했는데 입양처를 알아보더니 결국 저희 직원이 입양했죠. 거기다 노숙자 어르신 틀니 비용도 전액 그 친구가 부담했습니다. 대략 어떤 유형인지 감이 오시죠? 허허허.”
물어오는 기준에 가인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재단 운영방식만큼이나 투명한 재림의 행보였다. 거기다 투철한 책임감까지…… 8차선 거리라도 포기할 이유가 없는 가인이었다.
“무척 적극적이시네요.”
“본인이 선택한 건 끝까지 책임지는 스타일이에요. 하아, 결혼만 하면 딱인데…….”
묻지도 않은 공재림 얘기를 술술 꺼내는 기준에 가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금요일은 늘 오전 진료만 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로테이션입니다. 닥터 세 명에 직원 절반씩 해서요. 대신 나머지는 내일 오전 진료를 담당하죠. 한 달씩 돌아가면서요. 아, 공 선생은 저와 같은 조입니다.”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네요. 직원들이 좋아하겠어요.”
“다행히 호응이 좋은 편입니다. 제가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돈에 환장한 놈은 아니라서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건넨 기준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친화력이 좋아서인지 가인과 거리를 두지 않는 모양새였다.
호탕한 기준의 웃음에 가인이 결심을 굳혔다.
“원장님, 저 실은 공재림 선생님께 호감이 있어요.”
“정말요? 허허허허!”
뜻밖이라는 듯 잠시 두 눈이 커진 기준이 이내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서두르는 대신 그는 차분히 앞에 놓인 국화차를 먼저 음미했다.
“혹시, 공 선생도 알고 있나요?”
“공재림 선생님께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곧바로 거절당했지만요.”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가인에 고개를 갸웃한 기준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대표님이 먼저 고백을 하셨다고요? 보기와는 다르시네요.”
“너무 앞선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제 인생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감정이었어요. 그래서 용기 내봤습니다.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는 놓치는 편이 아니라서요.”
가인의 음성은 단호하고 간절했다. 그런 가인에게서 기준은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인상과 사뭇 대비되는 고백이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하면서도 불변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우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공 선생이 거절했다는 거죠?”
자존심을 살려주는 기준에 가인이 엷은 미소를 보였다. 뭔가 든든한 지원군을 만났다는 생각과 함께.
“원장님 보시기엔 어떠세요? 제가 공 선생님 타입이 아닌가요?”
꽤 진지한 가인에 기준이 즉답을 피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오작교 역할을 하는 만큼 신중한 모습이었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대표님 얘기가 나왔는데 공 선생이 대표님 칭찬을 많이 했어요. 기업 매각은 대단한 결정이었고 멋졌다고.”
“공 선생님은 제 얼굴을 모르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안 그래도 직원인 줄 알고 카드 줬는데 어떻게 하냐고 당황하더라고요.”
“그럼 혹시, 제가 밝지 않아서 싫었던 걸까요?”
이런저런 추측 속에 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준의 얘기만 들어서는 공재림이 딱히 자신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게 가인의 생각이었다.
그런 반면 기준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중이었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어떻게 보면 도도해 보이는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차디찬 눈빛과 입매 그리고 꼿꼿한 자세까지…… 절대 자존심을 굽혀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야말로 상류층 공주님이 연상되는 뻔하디 뻔한 ‘난이도 하’짜리 퀴즈.
그럼에도 의견을 물어오는 모양새가 기준은 가인이 거절당했다는 자존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떠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몇 번 겪을까 말까 한 누군가에 대한 확신.
‘이 여자, 진심이네.’
기준은 알고 있었다. 저 정도의 배경을 가진 인물이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는 그보다 몇 곱절 더 가치 있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일보 후퇴라는 것을.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네요.”
“네?”
“대표님께서 어떻게 회사를 정리하고 재단을 설립했는지, 이제 다 이해됐습니다. 결단력이나 추진력이 대단하시네요.”
“제 성격은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이강수 회장님, 지금의 미래유통을 만든 전설이시죠. 충분히 납득이 되네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린 기준이 깍지를 끼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공 선생과 5년간 함께 근무한 동료로서 말씀드리자면, 그 친구는 안팎으로 관찰력이 뛰어나 상대를 금방 파악합니다. 종종 그럴듯하게 포장한 사람도 잘 알아보죠.”
재림에 관한 기준의 설명에 가인은 아차 싶었다.
대부분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해진 그녀 자신을 재림은 포장으로 간주했을 거라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기준의 판단은 정확했다.
“공 선생이 거절했다면 아마 그런 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니 참고만 하세요. 참! 공 선생 아버님이 형사였다는 건 알고 계신가요?”
“네. 알고 있어요.”
“공 선생 모친이 살해당하셨다는 사실도 말하던가요?”
“……네?”
화들짝 놀란 가인의 어깨가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밝아 보이기만 했던 공재림에게 음지의 상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그 얘긴 안 했나 보군요. 형사였던 부친께서 검거한 강도가 출소 후 복수를 한답시고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랬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공 선생이 중학생 때였는데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많이 힘들어했더라고요. 그래서 유달리 책임감이 더 강한 면이 있죠.”
“모친이 돌아가신 건 공 선생님 잘못이 아닌데 왜 죄책감을 가진 거죠?”
처음 듣는 재림의 과거에 가인이 귀를 기울였다. 당사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혼란을 느끼는 가인이었다.
“사건 당시 자택에는 공 선생과 모친, 두 사람만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강도에 어린 공 선생이 저항하다 칼에 찔린 후 정신을 잃은 사이 모친이 당한 거죠. 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모친이 끝까지 싸웠답니다. 무려 열다섯 군데를 찔리고도 말이죠.”
“…….”
눈시울이 붉어진 가운데 가인의 왼쪽 눈에서 볼 줄기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