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독려 순례길 여행 - 응답한다 1988 21
순례길 15번째 보통날
아무 특별한 일 없는 소중한 '보통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는 하루하루 반복된 생활을 한다. 자고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걷고 정오쯤 되면 점심을 먹으며 한 시간 가량을 쉬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걷는다. 걷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친해질 때도 있고 같이 걷는 이들과 사는 이야기도 하다가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걷곤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도시나 마을을 구경하고 마트에 가서 먹거리를 사와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하다가 10시쯤 되면 슬슬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는 패턴이다.
길을 걷다가 관심 있는 여자도 생기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감동하거나 경사가 높은 산을 오른다거나 갑자기 날씨가 급격하게 변화해서 눈이 오거나 특이한 스페인 음식을 먹는 날 같이 특별한 에피소드가 생겨 기억에 날 만한 날도 있지만 그저 일기장에는 조용하게 몇 시에 일어나서 아침으로는 무엇을 먹었고 오늘 걸은 거리는 몇 km인지 적어놓은 아주 재미없는 날들도 있다. 심지어 일기나 사진을 보지 않았으면 이 날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 날도 있다. 보는 풍경도 거기서 거기고 건물도 비슷하게 생기고 길도 평탄해서 참 재미없는 '보통날'들이 있다.
나이를 먹으며 20대 후반이 되니 점점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점차 빨라져 갔다. 어렸을 적과 다르게 사회도 이전과는 다르게 빨라졌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고 시간을 잘 활용하게 만들기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빨리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급박하게만 만드는 것 같았다. 청년들은 이런 사회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고 드러낼 수 없고 사회에 맞춰 혹은 점수에 맞춰 삶을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저번 주에 뭘 했는지 심지어 어제는 어떻게 살았는지 소중한 '보통날'을 잊곤 한다.
처음엔 설레고 기대했던 길이지만 반복되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순례길도 비슷한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니 특별한 날이 없는 평범한 하루도 정말 소중한 '보통날'이었다. 그런 '보통날'이 없다면 '특별한 날'도 없을 것이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 날 하루하루가 지금의 현재 위치의 나를 만든 디딤돌이니까.
Carrion de los Condes
남과 여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 중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 사람 수로 보면 혼자 온 사람 둘이 온 사람 그리고 세명 이상이 단체로 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두 명 이상 걷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으로 순례길을 걷는 분들도 있었고 노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이들, 가족끼리 걷는 사람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만나서 함께 걷는 남자와 여자도 있었다.
나 또한 걷다 보니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겼고 같이 길을 걸으며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바로 어제 만나 같이 공을 찬 친구였다. 우연히 오늘도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렀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루이자'라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프랑스 여자와 같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요리해서 두 명의 프랑스 여자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한 이탈리아 남자 순례자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루이자에게 말을 건넸다. 들어보니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작업을 거는 모양이었다.
'루이자'는 체구는 작지만 남미를 혼자서 자전거 여행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고 체력이 좋고 무엇보다 깡다구가 강한 순례자였다. 그녀는 그가 불쾌했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 off"라고 꺼지라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단칼에 거절한 그녀가 멋져보였다. 그 이탈리아 남자도 민망했는지 바로 자리를 피했다.
알고보니 이탈리아 남자는 다른 이탈리아 친구와 함께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알베르게로 돌아온 것이었고 같이 간 이탈리아 친구는 자신의 여자친구는 숙소에 홀로 두고 술집에 간것이었다. 여자친구 되는 이탈리아 여자분은 어쩐지 계속 얼굴색이 안좋아보였고 남자친구가 혼자 두고 나간것도 모자라서 술에 취했으니 화가 나서 둘은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도 예의는 지켜야한다. 물론 자기 여자한테는 더더욱 지켜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