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소망을 비는 곳

응답한다 1988 El Acebo 철십자가

by 꿈충만

Episode

- 관광버스

- 철 십자가

- 한 중 일


"이 돌 철 십자가에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작년 아스토르가 알베르게를 떠나는 아침 전 날 죽을 끓여주시고 도움을 주신 한국인 여성 순례자분께서 돌을 하나 건네주시면서 부탁을 하나 하셨다. 돌 하나를 가지고 가는 것은 베푼 친절에 비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리고 철 십자가는 무엇인지도 몰라 되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묻는데 철 십자가는 어떤 것이고 돌은 왜 갖다 놓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늘이나 내일 중 순례길 위에 큰 십자가가 있어요 거기다 돌을 놔주시면 되는데 순례자들이 자기 고향에서 돌을 가져다가 소원을 빌고 돌을 얹어놔요. 제가 다리가 아파서 못 가니까 충만 씨가 제 대신에 놔주세요"

그렇게 나는 그분이 건네주신 돌 하나를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서며 작별 인사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평탄했던 메세타 고원 길이 끝나고 오르막길이 연속되는 날이다.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을 걷기 전에 아스토르가

외곽에서 무덤 하나를 봤다. 1988년도에 사망한 순례자를 기리는 무덤이었다. 내가 태어난 년도에 사망한 순례자의 무덤을 보다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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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삶을 살아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이르는 인생처럼 하루하루 길을 걷다 보면 순례자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그 길 위에서 제 각각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삶을 살고 또 길을 걷는다. 살다 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평평한 길도 있고 내리막 길도 걸으면서 좋은 사람도 만나고 때로는 안 맞는 사람들도 만나곤 한다. 하지만 결국에 그 길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우선 걸어보고 되돌아보는 수 밖에는 없다. 하루하루 감사히 여기며 만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말이다. 누군지 모를 1988년에 하늘나라로 간 순례자의 무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스토르가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는 고도가 870m에서 1,150m 까지 오르고 폰 세바 돈은 1,430m 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높은 고도를 오르게 되었지만 작년과 다르게 같이 걷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고 오히려 즐겁게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새 친구


아스토르가 알베르게에서는 한나라는 한국인 여성 순례자와 친해졌고 후안고 사무엘이라는 스페인 이름으로 불리는 중국인 남자 순례자와 친구가 됐다. 그리고 오늘 신기하게도 라바나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에서 점심을 먹다가 학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5년 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하지는 못해서 이번 기회에 휴가를 내고 남은 길을 마저 걷기 위해 왔다고 한다.


선배는 라바라 델 까미노에서 묵을까 아니면 걸을까 고민하며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더 걷는 걸 추천해 드렸다. 사람들이랑 친해져서 같이 걷고 싶어 하셨는데 그럴 때는 사람들이 많이 묵는 마을 및 도시에서 묵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묵으면 친해지기도 쉽고 이후에도 같이 걸으며 친구를 만들기도 쉽기 때문이다.


3월 중순이 되니 반팔을 입고 걸을 정도로 날씨가 좋아졌고 오늘은 고도도 1,000m 가 넘는 길을 걸으니 구름이 가까이 있고 하늘이 새파랬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폰 세바 돈 까지 즐겁게 걸어 도착했다. 대부분이 폰 세바 돈에서 묵고 산을 넘어 내려가는데 나와 준택이는 오늘 걸은 길이가 성에 안찼는지 더 걷고 싶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몇 시간이고 더 걸을 수만 있을 것 같았다.


같이 걷고 있던 후안과 사무엘도 더 걷기로 해서 나와 준택이와 동행하기로 했다. 후안과 사무엘은 32살로 나와 준택이보다 형이었다. 그들은 마드리드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둘 다 기친 기색은 하나도 없이 정말 잘 걸었다. 알고 보니 후안은 중국군에서 2년 동안 사병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사무엘은 모국어인 중국어는 당연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의 스페인어 이름은 사무엘이고 나의 스페인어 이름은 마누엘이었다. 신기했던 그의 이름은 임 자목 나의 이름은 임충만으로 성씨가 같았다. 한 때 왕씨 성을 가진 연예인이 중국인인지 화교인지 우리나라 사람인지 인터넷에서 논란이 일어 관심을 가지고 성씨에 대해 찾아보다가 임씨 성의 유래가 중국 은나라에서 유래됐다고 들었는데 스페인에서 먼 친척뻘 되는 순례자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했다.


철 십자가


4명이서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금방 철 십자가에 도착했다. 5시가 넘어서인지 순례길 위에는 거의 순례자가 우리를 제외하곤 없다시피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크지는 않지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가 바로 철 십자가다.철 십자가가 있는 곳에 선사시대 때는 재단이 있었고 로마시대 때는 죽음의 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재단이 있었다.


철 십자가 주위에는 순례자들이 가져와서 봉헌한 돌들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한국에서 가져온 돌을 대신 가져가 놔달라고 부탁하신 아스토르가에서 만난 봉사자분처럼 어떤 순례자들에게는 철 십자가는 정말 중요한 장소이다.고향에서 가져온 돌 이외에도 순례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나 악세서리나 기념품 그리고 쪽지 등을 적어 놓으며 자신의 소망을 빌고 또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도 한다.


나도 우연히 작년에 철 십자가를 지나칠 때 부탁하신 돌을 얹어놓고 마침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이 한 장 있어 잘 되게 해달라고 돌 사이에 놨지만 다시 찾아오니 찾을 수 없었다. 추억을 회상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북적북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관광버스 한 대가 오더니 아줌마 아저씨 한 분 한 분이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바로 관광 버스 였던 것이다. 예전에 비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다보니 투어그리노, 택시그리노(Tourgrino, Taxigrino) 등과 같은 신조어도 생겨났다. 순례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중요 포인트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둘러보는 이들을 뜻하기도 한다. 유명 관광지에 사람이 몰리는 것처럼 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생각하고 걸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순례길을 여행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순례길은 목적에 맞게 온전히 발로 걸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피해를 주는 투어그리노들을 싫어하는 이들의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나 성수기인 여름에는 한정된 숙소 때문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알베르게 전쟁'이라는 말도 있을만큼 민감하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그런 투어그리노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스페인 관광객으로 보였다. 관광버스를 타고선 단체 관광을 가시거나 등산을 가시는 대한민국 어르신들이 생각나서 그들이 귀여워보였다. 그들도 철십자가가 꽤나 신기했는지 다들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진을 더 찍고 싶었는데 그들 때문에 많은 사진을 찍지는 못해서 아쉬웠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내려가기로 했다 . 얼마 안가서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는 우리를 금방 앞질러서 내달렸다.


일몰


고도 870m 아스토르가에서 1,530m 철십자가에 오른 우리는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한 시간 정도 걸어서 잠깐 만하린에서 쉬기로 했다. 만하린에도 알베르게가 하나 있는데 호스피탈레로가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해서 순례자들이 쉴 수 있게 만들었다. 기부제로 음료도 이용할 수 있어 그의 배려에 감사했다.


날씨도 좋고 함께 걷는 이들도 좋아 힘들지 않았지만 30km 가까이 걷고 나니 슬슬 다리에 피로가 몰리기 시작했다. 시간도 6시가 넘어가니 점점 쌀쌀해져서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거의 2시간이 좀 안걸려서 엘 아세보(El Acebo)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고보니 만하린에서도 7km를 더 걸어야 했는데 혹시나 이렇게 먼 거리인 줄 알았따면 폰세바돈에서 멈췄을지도 모른다. 몸은 힘들고 다리는 아팠지만 그 덕분에 정말 멋진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엘 아세보는 마치 산 골짜기에 있는 요새이자 쉼터 같았다. 우리가 찾은 알베르게는 이제까지 알베르게와 달리 호텔같이 생겼고 알베르게 앞에는 승용차가 많았다. 엘 아세보는 딱 스페인 사람들이 가족끼리 드라이브 하고 바람쐬기 좋은 곳 같았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축구를 보며 휴식을 취하다가 한 50대 한국 남성 순례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됐다.



알베르게 : La casa del pereg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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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010.JPG 곧 오르막이 시작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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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022.JPG 아스토르가에서 처음 만난 한나,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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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038.JPG 후안 사무엘 요코 충만 한나 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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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075.JPG Fonceba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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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079.JPG 철 십자가 La Cruz de Ferro 1530m
IMG_7096.JPG Manj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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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131.JPG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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