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7일 가족들과 설을 쇠기 위해 마음마저 편안한 국적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오랜만에 친정에 오면 으레 그렇듯 그동안 못 먹고 산 마냥 온종일 먹고, 누워 있고, 손자를 보여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인 양 아이를 맡기고 동네 구경을 다녔다. 소소하지만 아이 엄마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를 누렸다.
21일, 언론을 통해 국내에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밖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에 공포를 느꼈고, 발은 묶였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다 더 이상 때를 놓칠 수 없어 어렵게 비행기 표를 예약했는데 상황이 악화되어 출국길이 막혔고, 또 다시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외국인으로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증빙서 기한이 만료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고, 상황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두세 달은 안전을 위해 친정에 있었고, 또 서너 달은 이제 곧 언제 갈지 모르니 집 구하기가 애매해서 친정에 있게 됐고, 다시 두어 달은 갈피를 잡지 못해 표류했고, 다시 서너 달은 남편이 홀로 출국하게 되어, 아이와 결혼 전 내가 쓰던 방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는 어디 어디에 ‘살아보기’였다. 살림을 시작한 중국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소액이지만 꾸준히 적금도 들었다. 온 우주가 나의 소망에 귀를 기울였는지 나는 친정 우리 집에서 살아보기를 하게 됐다. 적금도 깨서 목적에 딱 알맞게 우리 집 살기를 하며 요긴하게 쓰고 있다. 역시 저축은 중요하며, 꿈은 이루어진다.
남편과 나는 주말 부부로 각자의 우리 집에서 1년 반을 살았고,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는 미정이다. 생계와 아이의 발달 과정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로 아직 상황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에 살며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가족 생활을 경험하게 됐고, 노년에 접어드신 부모님의 낯선 모습을 보게 됐다. 그렇게 따뜻함과 애잔함을 느끼고, 고민과 화를 쌓았다.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어쩌면 코로나 시대를 겪고 있는 누군가와는 비슷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혹은 양육과 경제활동 등의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 독립생활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회귀한 누군가와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이제는 길에서 재채기하는 고양이와 강아지마저 피해야 하는 적막한 시대를 살며 글로나마 긴장되고 각박해진 마음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