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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Jul 15. 2019

경험이 가져다 주는 것들

밥을 벌면, 밥을 하면 철이 든다


종가를 지키는 ‘종부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종가에 머물렀었다.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가이기 이전에 가족들이 생활하는 가정집이어서 허락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지도 교수님께서 도와주셨고 종부님께서도 허락을 해주셔서 500년 가까이 제 역할을 해오고 있는 서까래 아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환경이 갖춰진 뒤에도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연구도 좋지만, 종가라는 특수한 환경이긴 하지만 정말 남의집에서 그것도 한옥에서 살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고민이 됐지만 한번 해보고 싶기도 했고, 되돌리기에는 떠올려지는 얼굴들도 너무나 많았다.  


이삿짐이라기보다는 보따리에 가까운 물건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선 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긴장을 했다. 멀리서 봐도 높고 반듯한 기와는 장엄했고, 돌담은 한없이 높게 느껴졌다. 오래된 집이 왜 이리 흠 없이 깨끗한지 기가 죽었다. 대문의 두께를 보아하니 두드려도 소용없을 것 같아 살짝 밀어보았다. 힘과는 비례하지 않는 찌그덩 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이 열렸고,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계시는 것이 보였다. 종부님이셨다.

 

종가에는 종부님과 따님이 살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머물게 될 방을 둘러보고 밥상에 앉았다. 종부님은 장보기가 쉽지 않아 찬이 없다며 미안해하셨다. 나는 이렇게 제대로 된 밥을 오랜만에 먹는다고 말씀드리며 다리가 짧은 상 앞에 앉았다. 어려움과 어색함으로 상 아래 다리는 둘 곳을 몰랐고, 밥 맛 역시 알 길이 없었다.

 

그 시간을 시작으로 ‘밥 먹기’는 반복됐다. 종가의 식생활이 중요한 연구 자료이기도 했고 종부님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활동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하숙생을 잘 먹이는 일이 종부님께는 중요한 일인 듯했다. 할머니, 언니, 나는 밥상에 둘러앉아 그 날 찬의 간이 어떤지 반찬의 재료와 조리 방법이 무엇인지 이야길 나눴다. 대체로 국, 고기나 생선, 마른반찬, 장아찌류가 종류를 달리해 차려졌다. 종부님은 매끼 간이 어떤지 물으셨는데 뭐라 말씀드리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워 그저 맛있다며 웃어넘기곤 했다.

 





할머니께서는 일찍 주무셨고, 나의 귀가는 조금씩 늦어져 종가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일은 점차 줄었다.  대신 아침을  꼭 함께했다. 그런데 그 아침밥이 문제였다. 당시 위가 아파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밥그릇 가득 떠주시는 밥과 국을 먹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밥을 그것만 먹어 어쩌냐며 걱정하시는 할머니께 반찬을 많이 먹고 싶어 그런다며 얼렁뚱땅 밥을 덜어내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상에 오른 사골국은 나를 진땀 나게 했다. 평소라면 없어서 못 먹을 음식이지만 위장약 복용자의 아침으로는 난코스였다. 밤새 큰 들통을 올렸다 내렸다 하시며 불순물을 걸러 끓이셨을 생각을 하니 덜어내기가 죄송해 힘겹게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나의 표정이 영 이상했는지 종부님은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 것 같다며 걱정을 하셨다. 결국 난 위병이 생겨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며 진실을 고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걱정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을 뒤로한  종가를 나섰다.


학교를 다녀와 저녁 밥상에 앉자 국그릇에 큰 무가 턱 하니 걸쳐져 있는 동치미가 상에 올랐다. 위에 좋다며 만들어 주신 음식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고생하시며 만드셨을 생각을 하니 죄송했고... 감사했다.  국물은 시원했고, 무는 아삭했고, 무엇보다 투명하게 분홍빛을 내는 동치미의 색이 고왔다.

 

밖에 나와 살면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는다.

 

“잘 지내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픈 데는 없고?”

“아프긴요. 잘해 먹고, 잘 지내요.”



함께 밥상에 앉을 일이 없어지는 순간 소소한, 그렇지만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 수도 있을 일상이 감춰진다. 식탁에서 볼 수 없는 그 날의 표정, 진실로 잘 먹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그렇다. 아파서 고생하고 있다는 건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었다. 굳이 걱정하실 일을 전하고 싶진 않았다.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언니만이 밥상머리에 앉아있는 나의 고달픔을 알았다.

 





간은 점차 맞춰졌다. 젓가락이 자주 가는 찬으로, 남겨지는 음식의 양으로 나의 입맛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또 자리가 점차 편해지며 맛에 대한 표현을 하게 됐고, 낯설던 종가의 밥상이 익숙해지기도 했다. 달이 갈수록 할머니께서는 간에 대해 덜 물으셨고, 나 역시 재료와 조리법을 묻는 일이 줄었다. 어느새 고택의 가족으로 교자상에 둘러앉아, 간을 맞추며, 씹어 삼키며 밥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바쁘셨다. 소소하게나마 일구신 텃밭의 농작물들을 가꾸고 거둬들여야 했고, 고택의 식구들과 멀리 있는 가족들을 위해 식재료를 뜯고 손질해 담그거나 말려 보관하셨다. 대청에는 항상 색이 선명한 작물들이 소쿠리에 올망졸망 담겨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자연의 색을 담은 당근, 오이, 상추를 한없이 바라보며 오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옥의 특성상 문을 통과해 바깥바람을 쐬야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늦가을, 스무 발자국 정도 되는 거리는 십리처럼 느껴졌고 밤에는 더욱더 바람이 매섭고 무서웠다. 또 간간히 동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그 밤이 얼마나 조용한지 가족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 역시 이른 잠을 청했다. 9시에도 그렇게 곤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좋은 공기 마시고 챙겨주시는 밥을 먹는 새 병도 나았다. 다시 파가 숭덩숭덩 들어간 진한 사골국이 당기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동치미 역시 질리는 법이 없었다. 건강해졌고 밥도 많이 먹었다. 끝내 퍼주시는 고봉밥만큼의 양을 다 먹지는 못했지만 잘 먹었다.






종부님의 어머님 역시 큰집의 여성으로 항상 객을 먹이셨다 하셨다. 손님은 그냥 보내는 법이 아니라며 몸소 가르쳐 주셨는데, 그 딸인 할머니 역시 나를 먹이셨다.


음식은 손이 많이 간다. 우리나라 음식은 더욱 그렇다. 끓여서 소금, 간장 조물조물 무치면 끝인 것 같은 음식도 재료 손질에서 품이 많이 든다. 간장, 된장도 그냥 만들어 지진 않는다. 30년을 넘게 먹고 산 음식인데 내가 차리기 전까진 몰랐다. 철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께 밥 한번 차려드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밥을 벌면, 밥을 하면,


생각이 든다.


철이 든다.


또다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 타국의 부엌에서,  뜨거운 불 앞에 멍하니 서서 국에 떠있는 회갈색의 불순물들을 건져내며 생각을 한다. 엄마는, 할머니는 국을 떠내며 무슨 이야기를 그리셨을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종가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다. 방송에서 한옥이나 종가의 이야기가 나올때면 여지없이 반갑고, 그곳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육십이 됐을 때, 칠십이 됐을 때 허전하고 심심하지 않기 위해 기억거리들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바지런히 움직인다. 언제, 어디서 운좋게 좋은 기억과 경험들을 만나게 될 지 모르니까말이다.   




머물던 종가의 모습(종부님께서는 직접 아궁이에 불을떼 방을 뜨겁게 해주셨다 )


만들어 주셨던 떡과 동치미 그리고 대청에 놓여있던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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