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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Nov 15. 2019

엄마, 아빠에게도 장난감은 필요하다

육아, 공간, 관계  

아기는 생후 70일에 첫 비행을 시작했다. 혼자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를 탈 자신이 없어 남편을 한국으로 불렀다. 여리고 작은 아기도, 친정집 방 한 칸을 가득 메운 물건의 운반도 문제였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양가 어른들께서 사주신 옷, 지인들의 축하 선물,  두 살부터 일곱 살까지의 형과 누나들이 물려준 물건, 아기를 생각하며 우리 부부가 마련한 물건들이었다.


나와 남편은 각각 23kg, 아기는 기내 유모차 제외 10kg이 가능했다. 비행기표는 무료고 부가가치세만 2만 7천 원을 낸 아기도 10kg의 수화물을  받아주니 감사하긴 했지만 날 데려가라고 애원하듯이 포개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니 대책이 안 섰다.


신중하게 생각한 후 중국에서 살 수 없거나 한국과 가격 차이가 큰 분유와 기저귀 등을 우선순위로 챙기고,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꼭 써야 하는 물건인 손톱깎이, 샴푸, 로션 등을 빈 공간에 채워 넣었다. 그래도 공간이 부족해 EMS로 20KG 가까운 상자 3개를 보냈다. 아기를 출산한 교민분들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올 때 6개의 캐리어가 평균이라 했는데 우리도 결국 평균 축에 끼고 말았다.


이후 일 년에 서너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했다. 아기가 차츰 중국에서 판매하는 기저귀에 적응을 할 즈음 약간의 공간이 확보되긴 했지만, 개월 수에 따라 필요한 물건은 매번 업그레이드됐다. 우리 부부의 물건은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노트북도 꼭 챙겨 다녔는데 그건 포기한 지 이미 오래였고, 옷도 그랬다. 겨울에는 외투를 공항까지 입고 가서 검색대 들어가기 전 남편에게 건네주고 두터운 티 한 장만을 입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은 난방이 되고, 비행기에는 담요가 있으니 나름 짐을 덜기 위한 괜찮은 방법이었다.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들고 있거나 안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기, 두꺼운 외투, 유모차, 아기띠, 분유 가방이었다. 포기할 수 있는 건 나의 외투뿐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엘리자베스 벡 게론스하임<<모성애의 발명>>에서 어머니로의 이행은 "친숙한 권리 및 특권의 박탈과 같은 의미"이고 "몇 년이 지나면 그들이 원치 않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적이 없는 상황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주장대로 육아의 연차가 쌓일수록 불친절한 사건들이 틈새로 새어 나와 나를 맥빠지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에 다녀올 때면 신간을 사가지고 오는 것이 행복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아기가 우리 집 왕이 된 후로 책은 책 따위가 되었다. 부피로나 무게로나 사치품이었다. 10권의 책은 분유 다섯 통 혹은 진공팩으로 포장한 기저귀 몇 백개의 가치를 가졌다.  


 책은 그렇게 계속 친정집 책꽂이에 보관되었다. 어느 날, 일과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인 아이의 낮잠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려는데 책이 없다. 그동안의 시간과 함께 '내 것'도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리곤 곧,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모성애가 부족해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침울해졌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내다가는 언젠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았다.  그것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말이다. 결국 아이에게도 마음의 짐을 안겨주는 것이다. 기저귀와 분유와 손톱깎이 때문에 말이다. 나와 아기를 위해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다짐을 했다. 이후부터는 우리 부부의 물건도 꼭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이다.


한국에 가려고 항공편을 예약하면서, 각오가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인터넷으로 화장품과 책 그리고 자질구레하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올 때 정말로 모두 가지고 왔다. 아기 것은 그만큼 넣지 못했지만, 사는 곳에서 해결해 보거나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하기로 했다.


특권까지는 아니더라고 '친숙한 권리'는 지키기로 했다. 사랑으로 낳은 아기에게 책임을 다하되 개인으로서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너를 위해 나의 물건을 사랑하는 것, 그게 우리에게 행복한 일이다라고 아기에게도 일러줄 생각이다.



아빠, 엄마, 너의 공간은 정해져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가 많은 걸 사 주셨어도 이 모든 걸 캐리어에 담을 수는 없어. 우리 서로 양보해서 사이좋게 공간을 나눠쓰자. 네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듯, 엄마와 아빠 역시 장난감이 필요해.






중국 베이징 / 자연이 선물한 천연 썰매장 / 신나는 엄마와 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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