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에게 해방감을 준다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초등학교 다닐 때 교실에서의 모습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고 거침없이 손을 드는
친구들이 있었다.
꼭 손을 드는 애들이 또 들었다.
씩씩하게 자주 손 드는 친구들은
지목돼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교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주목을 받는다. 수십 명의 시선이
그 친구 한 명에게 맞춰지고 친구는
기세 좋게 자기 할 말을 한다.
그게 꼭 정답이 아니어도
속 안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내어 놓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찰나의 태도와 분위기가 멋져 보였다.
그들을 속으로 동경하면서 그렇게 못하는 내가 별로라고 느껴진 적이 많았다.
그 시절의 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위축돼있는 아이였다.
속에 있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하고
말하고 싶어도 삭히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행복한 순간보다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구제불능이고 회생불가능한 애였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 당시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부모님도
내 기를 살려주지 못하셨다.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결과만 기다리는
겁쟁이가 나였다. 달리고 뛰고 구르면서
놀아야 할 나이였는데 친구들 사이로
넉살 좋게 비집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나는 그러면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다.
외롭지 않은 척, 괴롭지 않은 척 이 정도에
머물면서 홀로 지내도 위축되지 않은 척..
속으로는 엄청나게 어울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최소한의 의사표현인 좋다! 싫다! 도
모호하게 대답했고 대답하면서도
상대방 눈치부터 살폈다.
진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무인도 외딴섬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표류하는
길 잃은 작은 새 그게 나였다.
자기 색깔이 없으니 눈에 띄지 않고
있어봤자 있으나마 나한 존재 같았다.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는데
그게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항상
남의 잘난 모습에만 눈길이 갔던 거 같다.
수업시간에 발표할 때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피력하는 친구들의
당참이 빛나 보였다. 그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거 같았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에게 내 생애 거의 최초의
잊지 못할 공개적인 칭찬을 받은 날이 있다.
반 아이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었고 선생님은
거침없이 내 작은 행동을 칭찬해 주셨다.
글짓기를 너무나 잘했다고 노인과 바다를 쓴
혜밍웨이같다고 말해주셨다.
내 아홉 살 인생 최초의 짜릿한 칭찬이었다.
그때 선생님께 들은 칭찬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서 나를 도와주고 있다.
나는 글을 제법 잘 쓴다는 작은 믿음을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날에도 말이다.
뭐 하나 잘하는 거 없고
잘난 구석 하나 없는 나에게
그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일말의
짜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이따금씩 글을 썼고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다.
발표 잘하던 친구들
쉬는 시간에 친구들 무리에서
호응을 이끌어내던
당당하고 활발한 친구들이
여전히 부럽지만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글을 쓰는 작은 행위 속에서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세 좋게 나를 외치게 하는
통쾌한 해방감이었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글을 끄적인다.
비록 그 누군가에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해도
나는 이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조금 더 능숙하게 터득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