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도 안 먹히는 어르신 제발 그만요!
빵을 팔고 있다. 빵 파는 일을 한지 몇 달 후면 2년이 된다. 두 달짜리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단순반복되는 일이지만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다. 매일 다양한 고객님들이 방문하시다 보니 뻔한 것 같지만 늘 새로운 날의 연속이다.
가게에 와주시는 좋은 고객분들과 별개로 한 달에 한두 번은 당황스럽게 만드는 고객님을 만나게 된다.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고객님은 빵을 사러 온 분이 아니고 매장 근처에서 부동산을 하는 부동산주인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은 본인을 이 동네 터줏대감이라고 소개하셨다. 빵을 구입하신 적은 없지만 참새가 방앗간에 찾아오듯이 매일 눈도장을 찍고 가셨다.
처음에는 어르신께 예의 있고 친절하게 응대해 드렸는데 점점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히 장사가 잘되느냐는 형식적인 인사만 하셨는데 날이 갈수록 사적인 질문을 지체 없이 막 던지셨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는 더 예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도 있어서 굳이 다 대답할 필요 없는 사적인 질문들에 대해 적당히 솔직하게 답을 해 드렸다.
매일 눈도장을 찍어서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하신 건지 부동산 어르신은 나날이 말이 길어지셨다.
점점 40대 초반 미혼여자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꺼내놓으셨다. 듣기 거북해서 그분이 자리를 뜨기도 전에 기분이 안 좋아지곤 했다.
제발 좀 안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실하게도 꾸준히 매일 오셨다.
그분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는데 노총각이라고 했다. 내 나이를 물어보셨을 때 솔직하게 말한 것과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에 순진하게 없다고 말한 게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그분은 나를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놓고 아드님 대신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 아닌 어필을 하기 시작하셨다.
자신은 며느리에게 아파트를 사줄 것이고 차를 사줄 거라고 했고 일 안 하고 놀아도 된다고 하셨다. 아니 어르신, 그건 미래의 며느님과 상의하세요! 저한테 와서 이러지 마시고요!! 가만히 빵 팔고 싶은데 왜 매일 와서 귀찮게 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삼켰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께 싹수없게 대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서인지 싹수없어 보이게 속에 있는 진심을 말로 꺼내놓을 수 없었다.
어르신이 주는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지혜롭게 벗어나고 싶었다. 나보다 나은 미혼여성을 소개해드리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주변에 시집 안 간 단아하고 어여쁜 언니가 생각났다. 그 언니가 현재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언니를 소개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어르신의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분의 아드님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한 거다. 언니에게 연락해 보니 언니는 소개받을 마음이 전혀 없다고 했다.
어르신께 이런 상황을 말씀드렸다. 이 정도 노력했으니 더 이상 아드님의 결혼이야기를 안 꺼내실 줄 알았다. 내 생각보다 어르신은 더 강한 집착을 갖고 계셨다. 끈질기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의 대응이 도무지 먹히지 않는 분이라는 걸 실감하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남자 친구가 없는 게 아니고 사실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둘러댔다. 어르신은 그때부터 내 가상의 남자 친구에 대한 호구조사를 시작하셨다.
남자 친구 어디 살아?
직업이 뭐야? 돈은 많아?
아파트는 사준데? 결혼은 안 해?
얼마나 만났는데?
친한 친구도 쉽사리 던질 것 같지 않은 사적인 질문을 하셨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 부모님의 직업에
대한 호구조사도 하셨다. 마치 다음 달에 상견례라도 하실 기세였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김치국물 사발을 다 들이키신 거다.
있지도 않은 가상의 남자 친구 직업과 사는 동네를
아무 데나 떠오르는 동네로 말했다. 직업은 그냥
돈을 잘 번다고 했다. 그러면 그만하실 줄 알았다.
그 후로도 어르신은 나를 찾아오셨고 자신이 했던 질문을 새까맣게 잊어버리신 듯 또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일시적으로 기억을 못 하시는 게 아니고 내 대답보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거에 혈안이 돼있어서 내 답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신 거 같았다.
어느 날은 쌓일 대로 쌓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가장 냉소적인 무표정을 지으면서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태도로 보여드렸다. 그 무심한 표정과 냉랭함이 들어 먹혔다. 어르신이 한동안 오지 않으셨다. 속으로 콧노래가 나왔다! 드디어 해방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분은 쉽게 포기할 거 같지 않았다.
내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왜 좋은 것은 실현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것은 실현되는 것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다. 어르신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셨다가 내가 방심하고 있던 어느 날 다시 모습을 드러내셨다.
"박양! 남자 친구에게 차 사달라고 해! 남자 친구가 아파트 사준데? 뭐 한다고 했지?"
어르신.. 가상의 제 남자 친구에 대해 호구조사 그만해 주세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고 싶은 말을 필터 없이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다음에 또 어르신이 찾아오면 뭐라고 답해드릴까?
"어르신! 남자친구가 돈이 있건 없건 제게 그게 1순위는 아니에요!! 그리고 남자친구 개인정보 그만 물으세요! 어차피 저 어르신 며느리 될 생각 전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마음 약한 나는 또 어르신이 질문하면 가상의 남자 친구에 대해 없는 스토리를 지어내어 답을 하게 되겠지만...
가상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실제 남자 친구가 있었다면 어르신께 사진이라도 보여드리면서 둘 사이의 깨 볶는 행복한 모습을 보여드릴 텐데..
어르신이 자신의 아들이 장가를 안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속이 터져서 그러는 것은 이해하는데 나를 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경험상 그렇게 장가가라 시집가라 스트레스 줄수록 아들 딸은 더 안 가는 거 같다.
연애도 결혼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어르신 제발 그 집착을 멈추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