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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Sep 20. 2020

#0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누구든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겁니다.

프롤로그


20대 초반, 일본인 친구와 잠깐 펜팔을 했었습니다. 일본어에 조금은 자신 있었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열 마디 대화를 작성하는데 30분 넘게 걸렸습니다. 언어의 장벽이란 걸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편지를 적는 기간이 갈수록 늘어났죠.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그때쯤부턴 자연스럽게 편지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여기 날씨는 좋아. 거기는 어때?”

“오늘은 뭐했어? 난 오늘 학교에 갔어.”

“뭐를 좋아해? 난 게임이 좋아.”

“이 가수 알아? 일본에서 유명하던데.”


상대도 나도 쉬운 말만 고르다 보니 어느 순간 비슷한 말만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안부 묻기, 날씨 묻기, 하루가 어땠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 단순한 물음. 그것들을 대답하는 것 외에 더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모르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보다, 모르니까 갖게 되는 거리감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상대에게 예의가 아닐 수 있다는 순수한 배려가 거리감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편지는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의 기억이 인상적이었기에 언제부터인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펜팔과 달리 제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SNS와 비교하면 손은 많이 가지만, 그래도 편지를 보내면서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고,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 오지 않아 아쉬운 것도 있지만요.)



편지에 익숙해서일까요? 어느 날,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1997년에 개봉한, 故 최진실 박신양 주연의 영화 “편지”입니다. 옛날 영화를 즐겨보진 않지만, 제목에 이끌려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홀로 남겨질 아내를 위해 편지를 쓴다는 내용입니다. 아내는 그런 편지로 남편을 그리워하고, 종국엔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는 거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서글픔이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저는 무척 서글펐습니다.

죽어가는 이가 남겨질 이를 위해 애쓰는 그 모습,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데도 남겨질 이를 걱정해 편지를 쓰는 그 모습이 숭고하면서도 속상했습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세상에 홀로 떠나는 이 역시 두렵긴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죽어가는 이는 그저 쓰기만 할 뿐, 본인을 위한 편지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제가 주인공이라면, 전 슬펐을 겁니다. 저였다면 마지막에는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쓰는 만큼 누군가로부터 편지로 위로받고 싶었을 겁니다.

그때부터 고민했습니다. 편지를 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반대로 편지를 받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니까요. 막말로 요즘은 안부부터 생일 축하까지 SNS로 해결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굳이 편지라는, 불편하고 수고로운 연락을 쉬이 해줄까 싶어서요. 더욱이 지금도 아니고 언젠가 죽어갈 나를 위해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을 한다? 주변 지인들이 코웃음 치지 않으면 다행이고, 약속한들 지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약속은 기억에서 지워질 확률이 높겠죠.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나를 위해 편지를 쓰자.” 지금의 내가 죽어가는 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도 ‘나름 의미 있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걱정과 염려가 물씬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묘하게 즐거웠습니다. 우리 모두 미래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긴 하는데,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무척 드물잖아요. 상상을 시작하니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는, 그러나 알고 싶은 주제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


“전 언제쯤 결혼할까요? 결혼 상대는 어떤 부분이 제 이상형인가요?”

“전 10년째 가게 일을 돕습니다만, 언제까지 가게를 운영하나요?”

“잘 알겠지만,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대체 언제쯤이면 꿈을 이루나요?”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계시는 부모님, 노후엔 어떠셨나요?”

“부모님의 마지막은 행복하셨나요? 전.. 괜찮은 아들이었나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자녀들에게 전 아빠였나요? 아님 꼰대였나요?”


한 번 물꼬가 트니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편지 한 통에 모든 걸 적어서 보내고 싶었지만, 죽어가는 내게 그런 고됨(?)을 선물하긴 싫어서 한 통씩 나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당이 땡길 때마다 하나씩 까먹는 초콜릿처럼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편지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얼마나 편지를 쓸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펜팔 친구에게 보내는 것보단 많이 쓸 겁니다. 알고 싶은 마음과 함께 계속 보내고 싶은 마음도 뚜렷하니까요. 이 편지들을 통해 죽어가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약간의 소망이 있다면, 죽어가는 제 인생의 엔딩 크레딧 말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지를 읽다 보니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웃고, 울고, 떠올리고, 추억하다 보니 어느새 삶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좋은 엔딩이 있을까.”




추신(P.S)

“음악 한 곡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이왕이면 편지를 읽으며 음악도 들어주세요.”


https://youtu.be/v-5jAM0Zt4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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