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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Oct 04. 2020

#3 먼지를 품은 시

소흘했던 곳에 숨겨진 추억

#3 먼지를 품은 시



오랜만에 청소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깨끗한데 구석구석 살펴보니 먼지투성이더라고요. 원래라면 귀찮다고 넘어갈 법도 한데, 갈수록 심해지는 기침이 먼지에서 비롯된 거 같았습니다. 뭐라도 해야 건강해질 거 같아 큰마음 먹고 청소했습니다. (부모님 기뻐하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건강을 위해 마스크와 비닐장갑으로 무장한 후 먼지와의 사투를 시작했습니다. 털고, 닦고, 버리고. 늘어나는 물티슈를 감당할 수 없어 걸레를 동원했고, 혹여라도 먼지가 집안으로 들어올까 싶어 청소기를 틀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먼지가 밖으로 나갈까 싶어 말이죠.


으레 청소하면 겪는 일들을 차례차례 겪었습니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던 물건과 상봉하고, 언제 먹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과자 봉지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방에 이런 먼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가 많더군요. 그런 것들을 대충 잡다간 먼지가 크게 날리니 조심조심 꺼내서 비닐봉투로 직행! 그렇게 상봉과 또 다른 이별을 반복하던 중 묘하게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종이가 꽤 컸기에 여기저기 먼지가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하더라고요.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무언가 구겨진 종이를 발견하면, 그 안에 무엇이 적혀있을지 궁금한 거요. 혹시 은밀한 내용이 적혀있을지 또 압니까? (웃음) 물론 민감한 개인정보가 적혀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버리기 전에 한 번 확인하는 센스가 이럴 때 필요한 거겠죠. 그래서 아주 조심히, 섬세하게 구겨진 흔적을 펼쳤습니다.

가장 먼저 볼펜으로 급히 휘갈긴 필체가 눈에 띄더군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쓴 글들. 딱 봐도 악필인 게 제 글씨였습니다. 그것도 급하게 무언가를 썼던지 간격이나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휘갈겼다, 이게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글 내용은 웃기게도 창작시였습니다.

아마 꿈에서 본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영감을 받았나 봅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또 시 쓰는 걸 좋아하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 같아서 부랴부랴 적은 티가 역력합니다. 문제는 이미 꿈 내용이 기억에서 잊혀졌기에 ‘무엇을 보고, 느끼고 적은 시’인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도 어린 시절에 작성한 시는 내용을 몰라도 감동을 느낄 수 있으니, 시 한 편 보내고자 합니다. 원래는 글만 써서 보내려 했는데 기억에도 없던 시를 마주한 기념으로 함께 즐기고 싶네요. 



기억 속에 곱게 자리한

그대가 그리웠기에

잠깐이나마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담아

네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그대로인 그대

어쩌면 그 모습만 기억하는 나

입에 맴도는 어떠한 단어가

가슴에서 계속 떠오르지만

머리까지 닿질 못해서일까?

모호한 소리만 흘러나온다


보고싶다

고마웠다

좋아한다

미안하다


빗물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듯

감정이 한데 고여 굳어졌지만

여전히 표현할 수 없기에

조용히 입술을 감싼다


언젠가는, 또 언젠가는

전해지길 바라며



이 시를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무얼 떠올리든 당신의 마음이 아쉬움보다 후련함으로, 미안함보단 고마움으로 채워졌길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면 이제라도 전해주세요. 말이든 글이든, 전하지 못한 말과 마음은 위의 시처럼 계속해서 미련으로 남잖아요. 

저는 이 시를 음미하며 ‘무엇을 보고 썼던 시’인지 천천히 떠올려볼까 합니다. 한 번 본 건 잊은 게 아니라 잠시 가라앉은 거니까, 천천히 떠올리다 보면 기억하겠죠. 




추신(P.S)

기억에도 없던 창작시에 마음이 흔들렸으니, 이번에는 기억에 오래 남는 창작시를 편지와 함께 보내려 합니다. 당신이 아직도 이 시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창작자가 창작물을 까먹고 있다면, 창작물은 아쉬울 테니까요. (웃음)



계절은 지나갔는데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내 마음에 꽃이 피기엔

아직은 때가 아닌듯 합니다.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지만

얼어붙은 봄기운이 녹아들기엔

아직은 부족한 모양입니다.


작은 온기 한 줌이면

작은 관심 한 번이면

그걸로도 충분할 텐데

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도 고개를 내밀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봄이여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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