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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Oct 01. 2020

#2 양보할 수밖에 없는

영원할 것 같은 풍경이 바뀌는 순간

#2 양보할 수밖에 없는



이제는 익숙하지만, 한동안 거실이 낯설었습니다. ‘simple is best’라는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거실은 언제나 깔끔해야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가, 옷을 여기저기 벗어놓고 걸쳐놓는 경우가 많았죠. 어머니는 그때마다 크게 외치셨어요. 


“이 집안 남자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옷을 두는 거야!?” 


형이 옆에 있었으면 옳다구나 하면서 어머니 말을 거들었겠죠. 유일하게 어머니가 인정하는 청소 대장이 형이니까요. 첫째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던데, 맞는 거 같아요. 그래도 뭐, 치우는 것보다 더럽히는 게 쉽듯이 제 습관은 쉬이 바뀌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혈압이 오르시겠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호통도 요령껏 익숙하게 흘려 넘기거든요.

그런 우리 집 풍경은 항상 그대로일 거라 여겼어요. 호통치시는 어머니, 딴청 피우는 아버지, 그걸 보며 한 소리 거드는 형, 괜히 불똥 튈까 조용히 숨는 나. 작은 시트콤이지만 제겐 일상이자 나름 편안한(?) 풍경이었기에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게 웬 걸? 그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죠. 조카 차윤이가 집에 방문한 그날부터 해서.

아직도 눈에 선해요. 아이가 태어난 직후 처음 본 순간, 유리 너머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라 사진으로나마 봐왔던 성장들, 그리고 엊그제 같았는데 순식간에 자라 집에 방문한 날까지. 조카가 처음으로 집에 온 날은 기념일로 지정해도 될 정도였어요. 변하지 않던 풍경은 금이 가고 거실은 바뀌었죠. 철저히 아이를 위해, 조카를 위해. 

당신도 그 날(조카가 처음 온 날)을 떠올리면 좋겠지만 저와 달리 당신에겐 멀고 먼 과거일 테죠. 이해해요. 노인공경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예의잖아요. (놀리는 건 아닐 거예요.) 그나마 따끈따끈한 기억을 제가 갖고 있으니 그때를 추억할 겸 그 날의 풍경을 좀 적어볼까 해요. 보고 천천히 떠올려보세요. 




“아이에게 해로울만한 것들은 다 치워!”


평소에도 불호령이었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어마어마했어요. 분명 제가 새벽까지 일하고 늦게 잔 걸 알았을 텐데도 이른 시각부터 제 등짝에 손도장을 찍으셨죠. 그 도장이 찍히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아이처럼 청소를 해야만 했어요. 

와, 우리 집 거실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건 다 치우거나 버렸어요. 이러다가 살림살이가 반으로 꺾이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말이죠. 평소 같았으면 “버리지 마! 나중에 좀 더 쓸 수 있어.”라면서 어떻게든 물건을 쟁여놓던 아버지도 이날만큼은 버리기에 동참했답니다. 상상이 되세요? 

처음엔 호들갑이라 여겼어요. 아니,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아이가 아직 면연력이 약하니까 집을 청소해야 하는 건 이해해요. 그런데 굳이 잘 있던 걸 치우고 버린다? 제 눈에는 친척들이 집에 온다고 평소와는 다른, 나름 잘 정리된 집을 보여주는 것과 같게 느껴졌어요. 


'쉽게 말해 호들갑 떨기 혹은 체면 차리기'

 

그게 얼마나 피곤한지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치우면서도 건성건성,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라며 조금 대충 한 감이 있었어요. 물론 거실에 있던 대부분의 것들이 치워지고 버려졌기에 피로는 덜했네요. 구분하는 게 귀찮지, 보이는 걸 다 치우거나 버리는 건 쉽잖아요. 

호통 한 번에 하나가 치워지고 또 버려지고. 이것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덧 아이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왔어요. 아파트 정문이 보이는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하염없이 밖을 쳐다보는 부모님 모습, 기억하세요? 광고에 가끔 나오잖아요. 자녀들이 어디쯤 오나 싶어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 그걸 실제로 보니 묘하게 싱숭생숭하더라고요. 저렇게 좋으실까? 손녀가 그리 보고 싶은가?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쳤죠.


"저희 왔어요!"

"왔어?! 조심히 들어오고, 문 천천히 닫아!"


문이 열리고 거실 바닥에 차윤이를 눕혀놓은 순간은 정말.. 호흡이 잠깐이나마 멈췄어요. 뭔가 크게 숨을 쉬는 것도 약간 죄스러웠달까. 내 입에서 나온 이산화탄소가 아이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고민까지 했으니 원.. 그만큼 아이는 ‘감히 건들 수 없는 곳’에 존재했어요. 부모님의 기다림도, 호들갑도, 설렘도 모두 다 이해된 순간이었어요. 아이는 그렇게 집에 방문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었죠.

아이가 거실에 눕혀졌던 그날 이후로 거실 풍경은 계속 바뀌었어요. 듣도 보도 못했던 장난감부터 아이를 위한 물건들이 하나 둘 거실에 자리했죠. 미끄럼틀, 아이 전용 매트, 물놀이에 쓸 장난감, 큼지막한 인형, 음악이 나오는 아이용 마이크와 장난감 강아지. 그 외에 정말 많은 게 거실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어요. 이 풍경 기억나세요? 궁금한 건, 이 풍경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거예요. 약간 불편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사람 냄새가 짙게 베인 거실이 참 좋네요. (웃음) 




추신(P.S)

가물가물한 기억에 보탬이 될까 하고 사진 한 장 남겨요. 지금 우리 집 거실 풍경이에요. 보면서 기억나는 풍경이나 장난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하루는 꽤나 유쾌할 테니까.


요즘 유아용 미끄럼틀은 왜 이렇게 위험하게 만들어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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