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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10. 2024

사업계획서, 평가위원이 바라보는 관점

에피소드

에피소드


첫인상과 사업계획서의 평가


예비 창업자를 위한 사업 공고모집 기간이 마감되었다. 나는 사무실에 도착해 PC를 켰다. 메일함을 열자마자 신청자들의 메일이 눈에 들어온다. '수정 가능한가요?', '잘못 보냈는데 다시 보내도 될까요?', '전산 오류가 있었습니다', '꼼꼼히 봐주세요', '모집 기간 연장은 안 되나요?' 등의 메시지가 쏟아져 있었다. 안 읽은 메일만 142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일일이 답변해야 할 메일과 접수된 서류 평가가 겹쳐 정신이 없었다. 부사수에게 메일 답변과 공지사항 재안내를 부탁하고, 나는 200개가 넘는 사업계획서 검토에 착수했다. 첫 장을 넘기려는 순간, 옆자리의 부사수가 점심 메뉴를 물었다. 부대찌개와 국밥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부터 평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떠올리고 김밥으로 간단히 때우기로 했다. 김밥 두 줄은 먹었다기보다는 애피타이저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와 부사수는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인 사업계획서 평가가 시작된다.


첫 번째 신청자의 계획서 첫 장을 넘기자 신청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팀명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이템 제목이었다. "블록체인 기반 유통플랫폼"이라는 문구에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개요 페이지는 예상과 달리 항목별 간단한 설명이 아닌, 긴 서술형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3줄 이상의 서술형은 상대방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읽기를 꺼리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그래도 첫 신청서인 만큼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다.


읽다 보니 아이템의 개념이 이해되었고 대략적인 사업 방향도 파악할 수 있었다. 5년 넘게 사업계획서를 평가해 온 경험으로, 본문에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본문 내용을 빠르게 속독하며 확인했다. 아이템을 이해했으니 공모 취지와의 부합성, 요건 충족 여부만 가볍게 확인한 후 분류 박스에 넣었다. '보류', '잘함', '보완', '탈락' 등 나만의 기준으로 분류를 시작했다.


두 번째 팀의 사업계획서를 집어 들고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199개 남았는데 10일 안에 어떻게 거르지?'라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 사업계획서의 아이템 제목이 "AI를 활용한 유통플랫폼"이었다. '잠깐, 똑같은 건가?'라는 생각에 첫 번째 신청자의 계획서를 다시 확인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업이라는 것을 알았다. 


헷갈려서 개요 페이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각 항목이 간결한 한 줄짜리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어 보기 편했다. 보고서를 한두 번 써본 솜씨가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회사 생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작성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인식이 은연중에 아이템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런 항목별 정리 방식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읽기 쉽고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서술형에 비해 설득력 면에서는 다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대략 이런 느낌이다.


#신청자 A

어릴 적 시골 할머니께서 만드시던 된장, 고추장, 춘장의 향기 속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식물과 자연 먹거리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성인이 되어 문득 "할머니의 장을 파스타에 접목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를 곧장 실행에 옮겼다. 

첫 시도한 장 파스타를 주변인들과 나누며 다양한 반응을 얻었다. 모두를 만족시키진 못했지만, 이 피드백을 바탕으로 계속 개선해 나갔다. 특정 타깃층의 기호에 맞춰 맛을 조절한 끝에, 마침내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독특한 장 파스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지혜와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이 특별한 요리로,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 한다.
#신청자 B

- 배경: 시골 할머니의 전통 장 제조 환경에서 성장
- 아이디어: 전통 장을 활용한 파스타 개발 구상
- 개발 과정: 시제품 제작, 시식 평가, 피드백 반영, 타깃 설정
- 결과: 독특한 장 파스타 완성 및 소비자 호응 확인
- 계획: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새로운 도전 준비


글을 읽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후자보다 전자가 공감을 얻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머릿속에 생생한 그림이 그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설득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넷플릭스의 화제작 '흑백요리사' 결승전을 보는 것 같다. '에드워드 리(이균)' 셰프가 떡볶이에 담긴 추억을 한 편의 서사로 풀어내는 방식과, '나폴리 마피아(권성준)' 셰프가 강렬한 맛으로 임팩트를 전달하는 방식의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전자는 이야기로 감동을 주고, 후자는 직접적인 자극으로 인상을 남긴다. 결국 어떤 방식이 더 효과적인지는 독자나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은 분명 전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질적인 긴 여운은 2등을 차지한 '에드워드 리(이균) 셰프'가 강렬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몸소 공감했으리라.)



사업계획서 평가의 첫인상 효과


반면, 후자는 쉽게 눈에 띄고 가독성이 높아 빠르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공감의 측면에서는 머릿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단점이 있다. 결국 두 방식 다 장단점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적절히 활용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두 번째로 신청한 팀의 개요페이지는 절반만 이해한 채 본문으로 넘어가야 했다. 본문은 이미지 몇 장과 설명글로 가득했고, 기본 양식에 맞춰 글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계속해서 읽다 보니 어느새 눈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2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예상했던 그 '졸음'이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럴 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무용지물이다. 그 '졸음'이란 녀석의 힘은 참으로 대단해서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다.


그날 이후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적인 검토 작업을 시작했다. 점차 다양한 계획서들 사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60~70개 정도를 검토했을까, 자연스럽게 등급이 나뉘기 시작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계획서와 그렇지 않은 계획서의 차이가 뚜렷해졌다. 비교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 것 같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요소들이 계획서를 돋보이게 만드는지, 또 어떤 부분들이 계획서의 매력을 떨어뜨리는지 점점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성공적인 사업계획서 작성 전략


눈에 띄는 사업계획서는 제목만으로도 사업 내용을 단번에 유추하게 만든다. 또한 3D 모델이나 도식으로 아이템을 시각화했고, 서술이 필요한 부분과 요약이 필요한 부분을 적절히 구분했다. 볼드체로 강조점을 두고, 주석으로 세부 설명을 더했다. 심지어 글과 그래프, 도식의 비율을 잘 맞춰 마치 전문 투자보고서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팀도 있었다.


이런 계획서들은 본문 내용까지 짐작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첫인상 효과', 다른 말로 '닷내림 효과'이다. 처음에 받은 좋은 인상이 이후 평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서울대', '카이스트', '대기업', '글로벌 기업' 출신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프레젠테이션에서 팀 소개를 먼저 하는 것도 이런 긍정적 효과를 노리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눈에 띄지 않는 사업계획서는 아이템 제목이 모호해서 개요 페이지를 보고, 심지어 본문을 읽어도 아이템의 개념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아이템 제목과 개요 페이지에서 절반 이상을 사로잡아야 하지만, 이들은 예비 창업자이기에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사업계획서에 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추후 실전 파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아이템 제목'과 '개요 페이지'가 첫인상의 시작점이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사업계획서를 100개 넘게 검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가 요령이 생겼다. 짧은 시간 안에 주요 포인트만 확인하는 '나만의 가이드라인'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이 시점부터 상황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신청자들에게는 불운한 일이겠지만, 심사자인 나에게는 빠르게 평가를 마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효율성은 높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이 과연 공정한 평가를 보장할 수 있을지 고민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계획서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는 심사 시스템의 한계이자, 평가자로서 느끼는 딜레마였다.


처음엔 꼼꼼히 읽었던 서술형 내용도 이제는 가급적 생략하거나 속독으로 대충 훑어보기로 했다. 그 많은 내용을 언제 다 읽고 선정 발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의 열정적인 마음가짐과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평가의 질이 조금씩 변하게 된다. 시간에 쫓기는 압박감과 내면의 피로감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나만의 확인 규칙과 체크 사항을 만들어 활용하기 시작했다.


1. 아이템 제목과 개요 페이지를 중심으로 서류를 검토한다.   


2. 가장 먼저 아이템을 명확히 이해한다.


3. 본문은 대략적으로 훑어본다. 빠르게 넘기다 보면 성의 있는 계획서와 그렇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4. 유사 아이템이 예상외로 많다. 이런 경우 각 팀은 아무리 잘해도 점수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5. 차별화된 아이템 혹은 도표와 그래프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계획서가 눈에 띈다. (200개의 사업계획서를 직접 확인해 보면 느낄 것이다. 튀는 아이템이 얼마나 반가운지를 말이다.)


6. 주최기관의 취지와 의도에 부합하는 사항을 우선순위로 체크한다.


이런 방식으로 확인하다 보니, 강조체와 핵심 요약, 그래프, 숫자, 도식, 표를 삽입하며 작성한 팀이 심사자의 시선을 끌게 된다. 이 시점부터는 서술 글로 설득하려는 전략은 효과가 떨어진다. 물론, 텍스트를 많이 다루는 법원이나 국립국어원과 같은 곳에서 평가를 했다면 선호도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선 결국 화려하고 다채로우며 전문성 있어 보이는 모양새가 일단 먹힌다고 봐야 한다.(첫인상 만큼은 그러하다) 우리가 책 보다 유튜브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최근들어 심사 경향을 파악한 팀들이 논리적 가설을 바탕으로 화려하게 사업계획서를 꾸미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논리가 맞지 않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들이 많아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현실성이 부족한 가설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화려하게 꾸민 팀이 더 많이 합격하는 현상이 있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비주얼의 힘, 첫인상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겉모습과 잘 정리된 형식은 심사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때로는 내용의 부족함을 가리기도 한다. 이는 심사 과정의 한계이자,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점을 유심히 체크해 전략을 짠다면 합격률을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이러한 기교는 초기 단계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심사 라운드가 올라갈수록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진정성솔직함을 바탕으로 한 정공법만이 중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지금까지 서류 심사자의 입장에서 에피소드를 '믿거나 말거나' 형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봤다. 이 내용에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이 녹아있어, 읽는 이에 따라 공감이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역지사지'의 자세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류 심사자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찌르면 아프고, 배부르면 졸리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사업계획서의 포맷을 맞춘다면, 분명 선정 확률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팀의 정체성과 사업 내용이 불가피하게 생략되거나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정부 지원 사업이나 투자를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는 것은 좋지만, 이 과정에서 본래의 목적과 방향성을 잃을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이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심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되, 동시에 우리의 핵심 가치를 잃지 않는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업무 환경, 시간적 제약, 심리적 상태 등을 고려하여 사업계획서를 구성하면서도, 우리의 진정한 비전과 계획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단기적인 기교나 눈속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성 있는 내용, 현실성 있는 계획, 그리고 열정이 담긴 진솔한 표현이 결국 장기적으로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다.


사업계획서 작성은 단순히 합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비전과 계획을 명확히 하고 검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아이디어를 더욱 견고하게 다듬고,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발전시키며, 동시에 우리의 본질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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