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여주는 학기 내내 미뤄둔 기획서를 제출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래서 하루 전, 급하게 긴급 모드로 돌입했다. 교수님은 "기획서는 완벽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기 때문에, 여주는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첫 문장을 완성하는 데 20분이 넘게 걸렸고, 두 번째 문장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 남주가 코웃음을 치며 여주에게 말했다.
"지금 잉크젯 프린터처럼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네."
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잉크젯 프린터?"
남주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려고 하잖아. 그렇게 하면 밤을 새워도 못 끝낼 거야. 그냥 '스캐너 방식'으로 해봐.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핵심만 적고 나중에 다듬으면 될 거야."
여주는 남주의 조언에 따라 '스캐너 방식'을 시도하기로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키워드나 간단한 문장을 각 항목에 두서없이 빠르게 적고, 막히는 부분은 넘기고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신기하게도 글이 점점 술술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돌아가서 막혔던 부분도 더 쉽게 풀렸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1. 스캐너 방식이란?
내가 가칭으로 부르는 '스캐너 방식'은 글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작성하지 않고, 전체적인 구조를 빠르게 채워나가는 방법이다. 마치 스캐너가 문서를 훑듯이, 글 전체를 빠르게 살펴보며 떠오르는 키워드나 간단한 문장으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이 방식은 심리학 원리, 특히 초두효과와 확산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초두효과는 처음 접한 정보가 이후 사고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첫 인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적은 단어나 키워드는 앵커 역할을 하며, 이후 글 전개의 기준점이 된다. 이는 마치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앵커를 내리는 것과 같다. 앵커가 내려진 곳을 중심으로 배가 움직이듯, 첫 키워드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 기준점은 확산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 다양한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확장시킨다. 심리학자 J.P. 길포드(J.P. Guilford)가 제안한 확산적 사고는 하나의 출발점에서 여러 방향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마치 나무의 뿌리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스캐너 방식에서는 처음 적은 키워드 혹은 문장을 바탕으로 여러 주제나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창의성'이라는 단어로 시작했다면, 창의성의 정의, 중요성, 개발 방법, 창의성과 혁신의 관계, 교육에서의 창의성 등으로 사고를 넓혀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창의성'이라는 씨앗에서 여러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이 방식은 사업계획서 작성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사업 개요, 시장 분석, 마케팅 전략, 재무 계획 등의 큰 틀을 먼저 잡고, 각 섹션에 핵심 아이디어만 간단히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초두효과로 인해 각 섹션에 대한 아이디어 및 내용이 더 쉽게 떠오르고, 확산적 사고를 통해 내용이 풍성해진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첫 원리'에서 시작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스캐너 방식과 유사하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에서 시작해 점차 복잡한 아이디어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스캐너 방식은 이러한 인지적 특성을 활용해 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글쓰기, 특히 구조화된 문서 작성을 가능하게 한다. 초두효과는 사고의 시작점을 제공하고, 확산적 사고는 그 시작점을 바탕으로 사고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한다. 이 두 개념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사고가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자유롭게 펼쳐져 더 완성도 높은 문서를 만들 수 있게 된다.
2. 잉크젯 방식과 스캐너 방식의 차이점
스캐너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잉크젯 프린터 방식과 비교해볼 수 있다. 잉크젯 프린터는 한 줄 한 줄 완벽하게 이미지를 출력한다. 글을 쓸 때도 이와 비슷하게,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을 한 줄씩 쓰는 것이 잉크젯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이지만, 때로는 글쓰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작가의 막힘을 유발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스캐너 방식은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스캐너처럼 글의 전체를 빠르게 훑으며 핵심 키워드나 간단한 문장을 우선 적어나가는 식이다. 처음에는 공란이 많을 수 있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와 빈칸을 채워 나가면서 글을 완성도 높게 다듬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친다. 이 방식의 장점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잡혀가고 부담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빠르게 잡을 수 있고, 아이디어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반복적인 수정과 보완을 통해 글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이는 글쓰기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두 방식의 이해를 통해, 각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거나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스캐너 방식은 복잡한 구조의 글이나 장문의 글을 쓸 때 효과적일 수 있으며,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치고 싶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3. 스캐너 방식,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스캐너 방식을 적용하려면 가장 먼저 목차 설정이 중요하다. 글을 쓰기 전에 전체적인 틀을 잡아주는 과정이 바로 목차 설정이다. 다행히도 정부지원 사업계획서 양식에는 목차 및 가이드라인이 모두 설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차에 맞춰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빠르게 적어 내려가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문장을 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적고, 막히면 넘겨버리는 것이 이 방식의 핵심이다.
작성법 프로세스
목차 설정: 글의 큰 틀을 잡는 과정이다. 전체 구조를 정리한 뒤 각 항목을 설정한다.
빠른 키워드 작성: 각 항목에 생각나는 단어, 문장을 빠르게 적는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내용 보완: 전체 공란을 채운 후, 다시 돌아가서 빈 곳을 보완하고 세부 내용을 추가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는 단순하게 보였던 글이 점차 풍성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지게 된다. 처음에는 불안할 수 있지만, 계속해 나가면 글쓰기가 훨씬 쉬워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4. 스캐너 방식은 왜 효과적일까?
스캐너 방식은 글쓰기에서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고, 빠르게 초안을 작성하는 데 효과적이다. 완벽주의에 빠져 첫 문장부터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글쓰기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스캐너 방식은 떠오르는 대로 핵심을 빠르게 적어가면서 나중에 더 보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방식은 초두효과와 앵커링 효과라는 심리학적 이론을 잘 활용한 방법이다. 시험 문제를 풀 때 어려운 문제에 막혀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쉬운 문제부터 풀어내고 다시 어려운 문제로 돌아가는 전략과 유사하다. 이처럼 글쓰기도 쉬운 부분을 먼저 해결해 나가면서 어려운 부분을 나중에 보완하면, 처음에 어려웠던 부분도 훨씬 쉽게 풀리게 된다.
스캐너 방식의 장점: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빠르게 초안을 작성할 수 있다.
심리적 압박 없이 글을 시작할 수 있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정부지원사업과 같이 제출 마감이 명시된 사업계획서의 경우, 70~90% 작성된 계획서라도 제출이 가능하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듬는 사이클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잉크젯 프린터 방식처럼 작성하다 중간에 중단하면 뒷부분이 빈 공란으로 남는 것과 달리, 스캐닝 방식은 전체 내용이 일단 채워지므로 마감에 임박해서도 완성도 있는 문서를 제출할 수 있다.
단점:
처음에 완성도가 높지 않으므로, 나중에 보완 작업이 필요할 수 있다.
목차 설정이 부실할 경우 글 전체의 흐름이 분절될 수 있다. (다행히 정부 지원사업은 목차가 있다.)
큰 틀을 먼저 잘 잡아야 한다. (다행히 정부 지원사업은 틀이 잡혀져 있다.)
스캐너 방식은 특히 시간 압박이 있는 글쓰기 상황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정부지원사업 계획서나 학술 논문 등 구조화된 문서 작성에 효과적이며, 마감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도 전체적인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체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반복적인 수정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스캐너 방식의 주의 사항
스캐너 방식은 효율적인 글쓰기 방법이지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차 설정이다. 목차가 부실하면 글 전체가 분절된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글쓰기 전에 큰 그림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식은 주로 보고서, 설명문, 논문과 같은 두괄식이나 양괄식 구조의 글에 효과적이다. 반면,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글에는 덜 적합할 수 있다. 따라서 글의 목적과 성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
스캐너 방식의 핵심은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만들지 않고 빠르게 전반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다. 큰 틀을 먼저 잡고 핵심만 빠르게 적어놓은 후, 나중에 그 빈칸을 채우면서 글을 완성해 나간다. 처음에는 공란이 많더라도 나중에 돌아와 보완하면서 점차 완성도 높은 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이 방식의 장점이다. 이 방법은 빠르게 초안을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이후 세부적인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완벽한 글을 쓰려는 부담을 내려놓고, 일단 떠오르는 생각을 빠르게 적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글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더 쉽게 떠오를 것이다.
결국, 스캐너 방식은 글쓰기의 초기 단계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꼼꼼한 검토와 수정 과정을 거쳐야 높은 완성도의 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