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내 죽음을 미리 들여다봅니다.(4)
최근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죽음'을 전례 없이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고 '낭만적인' 죽음입니다. 풍광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호숫가, 평생의 애증을 나눈 친구와의 진심 어린 화해, 그리고 고통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는 마지막.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이 보여준 엔딩은 '조력사망'을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로 완벽하게 그려냈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역시, 예술 작품 같은 미장센 속에서 '명품' 라벨이 붙을 법한 우아한 죽음을 선보입니다.
이처럼 잘 만든 서사들은 "나도 저렇게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묘한 인지부조화를 겪습니다.
같은 시기, 불법적인 조력사망의 거친 현실을 파고든 MBC 드라마 '메리 킬즈 피플'은 대중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습니다. '은중과 상연'의 낭만적인 아이디어에 매혹된 우리는, '메리 킬즈 피플'이 보여준 고통스럽고 절박한 죽음의 민낯은 차마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되, 아름답고 통제 가능한 '판타지'로서만 소비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낭만적 죽음'에 대한 열망 이면에는, 우리가 이전에 깊이 들여다보았던 또 다른 공포가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시간'과 '존엄을 잃는 과정'입니다.
여러 웰다잉 전문가들의 일관된 목소리처럼, 시니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아플까"라는 생리적 고통과 "자녀가 내 결정을 번복하면 어쩌나" 하는 자기 결정권 상실의 불안입니다. 조력사망에 대한 82%라는 압도적인 찬성 여론은, 어쩌면 스위스에서의 '아름다운 선택'을 지지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싶지 않다", "내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고통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절규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불안이 겹칩니다. 바로 '1인 가구의 불안'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나의 마지막을 누가 치러줄까?"라는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지자체가 '웰엔딩 지원센터'나 '사전 장례 의향서'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이처럼 '홀로 남겨질 마지막'에 대한 공포에 사회가 응답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을 두고 극단적인 두 개의 시선 앞에 서 있습니다. '은중과 상연'이 보여준, 충분한 경제적·문화적 자본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궁극적 선택'이라는 낭만. 그리고 일본 영화 '플랜 75'가 경고한, '돌봄 시스템'이 부재한 사회에서 75세가 되면 죽음을 권유받는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충격.
문제는, '은중과 상연'의 낭만은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허락된 환상에 가깝지만, '플랜 75'의 불안은 언제든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이미 살 집이 없다는 이유로 조력사망을 선택한 사례가 보고된 것처럼, 사회적 안전망과 돌봄 시스템의 부재는 '선택'을 '압력'으로 변질시킵니다.
우리는 지금 '조력사망'이라는 하나의 결과에만 매몰되어, 그 과정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논의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의료윤리학자 김준혁 연세대 교수가 지적했듯, "말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지 않도록 돌봄 시스템 구축에 대한 논의를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웰다잉'은, 스위스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집에서', '고통 없이', '가족이나 혹은 사회의 돌봄 속에서', '나의 의사가 존중받으며' 마지막을 맞는 것입니다. '낭만적 죽음'이라는 지금까지의 미디어 판타지를 걷어내고, '고통 없는 마무리'와 '홀로 두지 않는 돌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가장 올바른 순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