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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Nov 02. 2023

[소설] About B

자유 작문 Free Composition

  




     그날은 파리에 사는 노신사 빨강이 언덕에 길게 누운 날이었다. 쓰러지면서 빨강의 코가 깨졌다. 서울의 한 독서 모임에 앉아있던 하양은 빨강의 코가 부서지는 바로 그 속도로 모든 게 지겨워졌다.

     자기소개를 하는 대각선 방향의 남자는 IT 개발 일을 한다고 했다. 말을 잘하고 싶어서 신청했다는 목소리보다 의자 끽끽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두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다리를 대롱거리는 모양이었다. 보기와 달리 남자의 다리가 몹시 길지도 모른다. 책상 아래로 낯선 남자의 다리가 끝도 없이 길어졌다. 그럼 의자 삐걱대는 소리는 멈추겠지. 하양은 볼펜을 돌리며 삐딱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얼마 못 가 옆자리 여자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독서 모임에 온 건지 집단 심리 치료에 온 건지, 하양은 머리가 아팠다.

      무료인 모임과 돈을 내는 모임의 차이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돈을 낸 죄로 이곳에 꼼짝없이 앉아있는 벌을 받고 있다니. 아, 이보다 더 지겨울 수 있을까. 물론이다. 세상에는 지겨운 일이 봄날 황사와 미세먼지처럼 한가득 떠돌아다닌다는 걸 하양은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으로 재밌는 일이 생기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망할 환경오염 덕분에 비를 보는 일이 매년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지겹다. 하양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 한 가운데에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죄다 쏟아내고 싶었다. 먼지 한톨까지 털어내고 나면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자기 자신도 뒤집어 탈탈 털어낼 수 있다면. 그러자 하양은 뒤집어진 자신에게서 B가 툭 털어지는 걸 보았다.

     B. B는 고요한 사람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규칙적인 시계 초침 같은 남자. 그는 지금 하양의 지겨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양은 책상에 놓인 B를 챙겨가야할지 고민이었다. B 마저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두려운 것 같기도 했고, 고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순간은 빨강의 코가 깨지는 속도로 올 것이다. 하양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고, 무엇 하나 뒤집어지지 않았고, 책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겹게도 B가 보고 싶었다.







Fin.



* 가끔 글쓰기 모임에 나가서 1시간 30분 정도 글을 씁니다. 주제가 정해져 있을 때도 있고, 자유 주제일 때도 있어요. 구상도 작성도 오롯이 그 시간 동안 합니다. 퇴고도 하지 않아요.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라 참 소중합니다. 지나고 보면 그 당시 제 상태가 일기보다도 잘 보이는 거 같아서 제법 즐겁기도 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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