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 대한 흥미는 고백 이후부터 급격히 식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경험 삼아 덜컥 시작한 연애는 상상 이상의 큰 책임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남자 친구’, ‘여자 친구’라는 사회적 합의 때문에 내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마음에 강제로 셋방을 주고, 시간과 감정을 쏟는 일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았던 상대방 역시 그때가 첫 연애였다. 줄곧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첫 여자 친구’를 좋아하고 있을 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몇 번인가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그는 특별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여도 상관없는 연애였을 뿐. 이해 없는 관습적인 애정은 불쾌함을 유발했다. 물론 나 역시 동기가 불순했으니, 일종의 대가를 치르는 거로 생각했다. 나는 상대가 바라는 연인상을 적당히 연기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구태여 입 아프게 떠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서적 데미지는 차곡차곡 누적됐고, 소와 사자가 그랬듯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야행성 인간인 나는 그 당시도 새벽 늦게 잠들고 정오쯤 눈을 떴다. 이런 사실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상대는 매일 본인이 등교하는 이른 아침에 “잘 잤어?”하고 애정 어린 연락을 보내두곤 했다. 사실 시간대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인사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허상의 여자 친구를 향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공허한 인사에 답하는 나의 문장들도 거짓이라는 게 문제였다. 정말 그 아침 인사가 싫었다. 읽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을 만큼 지독하게 싫었고 경멸했다. 이게 연애를 시작한 지 고작 2~3주 차의 이야기다. 헤어지는 게 마땅했겠으나 영혼이 쑥대밭이 된 채로 잘도 백여 일을 만났다. 관계를 시작한 책임이 있으니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해보자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미묘하게 정직하고 요령 없는 성격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연애하기는 글렀다는 것. 친구보다 애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훨씬 크다는 것. 좋아하지 않는 데 관계를 지속하는 건 자신의 영혼에도 타인의 영혼에도 상처를 남긴다는 것. 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관계를 끝내는 게 수백 배쯤 어렵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직 타인을 품을 그릇이 전혀 못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그 후 몇 년간 연애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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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이었던 ‘연애 시뮬레이션’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나는 꼬인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꼬였다는 게 뭔지 감도 못 잡을 이나와 사랑에 빠졌다. 매일 오전 어김없이 이나만의 아침 인사가 도착한다.
“잘 자고 있니?”
그와 연인이 되고 맨 처음 이 문장을 받았을 때 침대에서 한참을 배시시 웃었다. 이나가 “잘 잤어?”라거나 “일어났어?”하고 묻는 사람이 아니라, “잘 자고 있어?”하고 묻는 사람이라 좋았다. 이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일찍 일어나고 내가 늦게 일어나니까 이 안부 인사가 가장 적합하고 타당했으리라.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서 써낸 짧은 한 줄짜리 문장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 너가 그 질문하는 거 좋아.” 이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행복을 가득 담은 나의 답변이 재채기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 남자 친구에게 ‘이나’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그는 본인이 왜 이나인지 몰랐다. “맞출 수 있어, 맞춰봐.”하고 말했더니, “이나? Enough? 그만해!”하고 금방 천방지축 장난을 쳤다. 그는 왜 이나인지 구태여 캐묻지 않는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매사 그런 느긋함이 있다. 나는 그것을 ‘다정한 무심(無心)’이라고 칭한다. 이나는 언제든 나의 속도에 맞출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안일함이 아닌 관찰에서 비롯된다.
이나와 연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불쑥 찾아오곤 하는 불안과 별다른 사건이나 촉매 없이 마주했다. 이나를 좋아하겠다는 결심은 갑작스럽기도 했고 빠르기도 했으나, 경솔하거나 성마르진 않았다. 5분, 5시간, 5일, 얼마를 고민하든 같은 결론일 거라면 빨리 마음을 정하는 편이 나았다. 이나와 함께 하는 나날이 좋을 거라는 확실한 예감이 들었다. 강한 직관은 언제나 성장에 필요한 길로 나를 인도해 왔다. 삶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가봐야 하는 길이라는 게 존재했다. 나는 내 선택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나도 본인의 선택에 확신이 있을까?
혼자 고민한다고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지레짐작, 회피, 걱정, 불안 따위는 관계에 무익한 보람 없는 감정노동에 불과하다. 필요한 건 대화다. 어떤 문제든 입 밖에 낼 때 비로소 결판이 난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열정적인 행위이고, 사랑은 분명 그 노력 안에 자리할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이나야, 나는 네가 정말 좋아. 그런데 내 마음만큼, 그 크기만큼 너한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봐 걱정도 돼. 넌 불안하지 않아? 내 마음이 잘 전해지고 있어?”
“웅.” 침대에 같이 누워 뒹굴거리다가 갑작스레 마주한 내 질문이 부담스러웠을 법도 한데, 걱정이 무색하도록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이나는 정확한 언어를 고르려는 듯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음, 자기는 어떤 사람이 컵을 깨면, 그 사람이 화가 나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면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잖아.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결정했을 땐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나는 불안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아.”
그동안 우리가 대화한 시간을 허튼 걸로 만들지 않는 이나의 마침맞은 문장을 들으며 나는 몇 번이고 다시 그와 사랑에 빠졌다. 이나의 속이 내 짐작보다 훨씬 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때야 했다. 기분 좋게 산들바람이 부는 풍요롭고 너른 들판. 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눈물이 나려 했지만, 그때는 지금만큼 이나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의지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나를 힘껏 끌어안고 “니가 정말 좋아”하고 말했다. 오늘 우리에게 충분한 언어와 포옹이 있음에 안도하면서. 그리고 내가 느낀 벅참과 고마움을 언젠가 반드시 그에게 전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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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무심을 품고 푸른 초원을 만들어내는 이나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다. 서글서글 붙임성이 좋고 밝은 사람. 악의가 머물 구석이 없는 사람. 자기 삶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존중하는 사람. 여전히 선한 가치와 영향력을 믿는 사람. 그를 좋아하지 않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이나의 다정한 무심은 나에게 표현의 자유를 선물한다. 그와 있을 때 나는 내부에서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숨기거나 가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단지 더 잘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다. 판단은 필요한 만큼 유보하고, 서로를 관찰하는 일 자체를 놀이와 기쁨으로 만든다. 이나는 내 안에 있는 긍정적이고 밝은 면모, 창의적이고 아이 같은 본성을 한껏 끌어낸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명징하여 아름다운 현재가 펼쳐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지금, 여기, 있다” 하는 존재의 선언이 북소리처럼 힘차게 울려 퍼진다. 그와 내가 이 세계에 있다는 가슴 벅찬 사실을, 두웅 두웅, 영혼이 전율하며 깨닫는다.
매일 오전, 자신이 만나고 있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보고 있는 남자가 내게 인사한다. 혹여나 내가 그를 허상의 이상적인 남자 친구로 대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걸까, 걱정이 들다가도 금방 웃음이 터진다. “잘 자고 있니?” 푸르르 가슴이 떨린다. 아, 나는 그 인사가 너무 좋다.